■ 울림을 주는 시 한 편-67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을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읽지 않은 책이 읽은 책보다 더 많이 꽂혀 있는 거실의 책꽂이는 사십을 넘긴 피곤한 내 모습이다. 좋게 말하면 익숙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타협적인 사색. 어느 순간, 길 없는 곳엔 발길을 주지 않고 익숙한 길만 고집하는 나. 늦은 밤 책꽂이 앞에서도 읽은 책만 또다시 꺼내드는 권태로운 영혼의 익숙한 손길을 거부하지 못한다. 세계의 닫힌 문을 쉼 없이 두드리던 열정을 두려움과 안락 따위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그 많던 패기와 열정은 모두 어디로 가 버렸는가. 얼마 전까지 나는 쓰러진 나의 몸을 파고드는 좌절 앞에서 「삼십 세」의 한 구절을 기도문처럼 읊조리며 살았거늘……. “일어서서 걸으라, 그대의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잉게보르크 바하만).”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