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3
1964
임희구
그해 겨울은 암담했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 뱃속에 있었으므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나
손끝 하나 댈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눈보라가 쳤다
어머니 뱃살로 느껴지는 쌩쌩한 바람들이
날마다 귓전을 울렸다
그 무렵 아버지는 대패질을 하면서
다시는 건너오지 못 할 먼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암세포처럼
독한 약풀에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싹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할 생을
생살로 터득하면서
죽은 듯 입 꼭 다물고 눈 꼭 감고
한없는 날들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머니 그렇게 나를 지우고 지우며 품었다
그 혹독한 겨울이 물러가고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고 저물어 아픈 것들이 아득아득해지면
「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이 ‘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천원이 없어졌고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고, 시대의 암울을 소설로 적고 있을 때 임희구는 엄마 뱃속에 있었나보다. 암에 걸린 아버지, 팍팍한 살림, 어쩌자고 애는 생겨가지고……. 그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 역시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지워질 뻔 했다는 걸, 내가 아비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말해 줬으니까. 지난해 12월 31일, 평택에서 성환역까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결사반대 플래카드를 들고 1번 국도를 따라 임희구 시인과 함께 걸었다. 김근태 선생을 추모하며 내가 성환역 앞 막걸리집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 딱 세 곡만 더 부르자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어느 글에선가 김용락 시인은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한 임희구 시인의 시를 이야기 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을 어떤 식으로든 지녔어야 할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가 기교를 중시(?)하는 서울예대 문창과 출신이라는 점을 꽤나 불편해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런 생각은 리얼리즘문학을 오히려 더 협소하게 만드는, 그의 표현대로 ‘신원주의자의 편견’일 뿐이다. 노동자가 미학을 말하면 반칙인가? 그와 반대로 당파성이 없는 시인이 노동을 말하면 가식인가? 시의 정신은, 그렇게 간단하게 도식적 이분법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 출간된 임희구의 두 번째 시집 『소주 한 병이 공짜』를 읽어보면 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문학은 몰라도 인생은 절대 기교적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박후기 시인hoogiwoogi@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