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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울림을 주는 시 한 편-114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서산대사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청허(淸虛) 휴정(休靜)의 시 한 편을 적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거니와,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라의 명운이 갈릴 중요한 시점이기도 하기에 함께 의미를 되새겨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휴정은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린다. 이 시는 서산대사라는 호칭으로만 우리 귀에 익숙한 그 분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은 올 겨울뿐만 아니더라도, 누구나 눈 덮인 들판을 걸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처음 걷는 이야 막막한 심정으로 길을 내며 걸었겠지만, 그 다음 그 길을 걷는 이들은 한결 편하게 눈길을 걸었던 기억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알려진 바와 같이,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해 나라를 구한 분이기도 하다.

기득권층은 물론 임금마저 제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도망치고 있을 때, 불경 대신 검을 들고 왜군과 당당히 맞섰던 것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 어려운 시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제 몸을 아끼지 않았던 자들은 잘 난 양반들이 아니라 못 배우고 헐벗은 백성들이었다.

일신의 양명을 위해 조국에 대한 배반을 밥 먹듯이 하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자들이 권력마저 틀어쥐고 백성을 쥐어짜고 있을 때, 외세의 침탈에 가장 먼저 목숨을 잃으면서도 끝까지 항거해 싸우던 자들은 권력자들이 아닌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 역시 독립운동을 하며 휴정의 이 시를 마음 깊이 새겨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친일행위를 하고 제 나라 백성을 잡아가두던 자들이 변신을 거듭하며 버젓이 정치꾼이 되어 권력을 잡고 백성을 쥐어짜는 행태를 보고 서산대사나 김구 선생은 지하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프랑스는 지금까지도 나치 부역자들을 찾아내 법정에 세우고 조국을 배반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이젠 대 놓고 친일행위를 자랑하는 웃지 못할 일들까지 벌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대, 어떻게 후세들에게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라고 얘기할 것이며, 어떻게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는 삶을 살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만한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이 될 것이 자명하기에…….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