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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번동

울림을 주는 시

울림을 주는 시 한 편-116


녹번동

이해존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녹번동을 조금 알지. 불광동 옆, 서울의 안데스산맥쯤 되는 은평구 어디.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공기가 좋다는 말이 열에 일곱 번은 듣는 곳. 나는 왜 사느냐고 물었던 것이지, 거기 왜 사느냐고 물은 것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안데스산맥 꼭대기에 소금밭이 있다는 것은 한때 이 산꼭대기가 바다 밑바닥이었다는 것을 말해주지. 융기, 즉 바닥이 위로 솟아올라 꼭대기가 되었다는 뜻이라. 은총을 받아 산꼭대기로 쫓겨 올라간 가난들아, 반짝이는 빛과 소금들아. 가장 낮은 곳에 살면서 저 높은 곳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가난들아, 빛과 소금들아. 일어설 용기가 없다면 삶의 융기 또한 없다는 것을, 너희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