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
묵죽(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에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들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계신 곳에도 ‘숫눈’이 내리는지요.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을 바라봅니다. ‘다른 것이 섞이거나 더럽혀지지 않은, 본디 생긴 그대로’를 뜻하는 ‘숫-’. 세상에 드문 ‘숫-’은 이제 ‘숭고’하기까지 한데요. 장에 나가시는 “소쿠리 장수 할머니”의 삶처럼 말이지요. 이미 ‘숭고’인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墨竹)을” 칩니다. 그 소슬함에 “질척이는 먹물”마저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요. 마침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면 이제 다른 도리는 없습니다. “창들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이 순간 그림은 말없는 시가, 시는 말하는 그림이 됩니다. 올해는 모쪼록 저마다의 “허리가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세상을 견디는 삶이 되었으면.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