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02 마음의 오지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여름 한낮, 문득 ‘오지’를 떠올려 봅니다. 누군가 ‘오지’를 향한 발걸음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는 것과 같다고 말했지요. 보이지 않는 길, 아득함으로 이어지는 길일까요. 오늘의 시인이 들려주는 시편 역시 특별합니다. 깊고 깊은 ‘마음의 오지’이기 때문이지요. 종소리, 공중으로 스며든 것만 같은 그 소리는 빈 항아리 속으로 도착하게 됩니다. 고여 있는 종소리는 어느 순가 새로운 종소리로 태어날 수 있지요. 빈 항아리를 가득 메운 기억들은 밤이면 어두워지는 것으로 깊어지겠지요. 무수히 많은 소리들이, 기억들이 내 마음 속으로 도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문장처럼 ‘나는 내가 그립습니다’. 나, 영원히 그리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7 자고 새면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란 것을 생각고 있다 임화 자고 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랐다 행복되려는 마음이 나를 여러 차례 죽음에서 구해 준 은혜를 잊지 않지만 행복도 즐거움도 무사한 그날그날 가운데 찾아지지 아니할 때 나의 생활은 꽃 진 장미넝쿨이었다 푸른 잎을 즐기기엔 나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마른 가지를 사랑키엔 더구나 마음이 앳되어 그만 인젠 살려고 무사하려던 생각이 믿기 어려워 한이 되어 몸과 마음이 상할 자리를 비워 주는 운명이 애인처럼 그립다 -------------------------------------------------------------------- 임화, 낯선 시인일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한국 근대 100년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었던 대표적 문인이지요.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사가, 영화배우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던 열정의 인물인데요. 특히 프로문예운동사에서 독보적인 이론가 ‧ 실천가였지요. 안타깝게도 북녘 땅에서 비운의 삶을 마칩니다. 이러한 이력을 접어두더라도, 요즘 읽는 그의 시편들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자고 새면이라는 제목에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6 물 통(桶) 김종삼 희미한 풍금(風琴)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廣野)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 시는 희미한/풍금(風琴) 소리로부터 시작됩니다. 문제는 그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는 것. 인생의 불연속성을 떠올린다면 해석주의자의 병일까요. 이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묻습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고 말이지요. 막막한, 혹은 먹먹한 질문에 나는 대답합니다. 다름 아닌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그토록 찾아 헤매야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모두 무엇일까요. 요즘 우리는 꽃도 초록도 없는 늦봄을 견디고 있습니다. 차라리 눈 감았다고 해야 옳겠지요. 그런가하면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는가(요세프 브로드스키) 절규하는 시인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시인은 인간 찾기 여정에 대해 고백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5 물속의 나는 울지 않습니까 유병록 울음이 태어나는 곳, 물속의 생이 걷는 법을 배우는 곳, 발자국이 생기고 후회가 생기는 곳에서 저 사내는 몸을 휘감던 바람을 떠올리고 있을까 허공으로 달아나던 물기를 기억하려 애쓰는 중일까 무릎을 내려놓고 실패한 걸음을 번복하려는 듯, 말을 내려놓고 울음을 내려놓고 모두 없던 일로 되돌리려는 듯 수평선을 바라보는데 여기는 천천히 무너져온 해안선, 육지가 끝나고 바다도 끝나는 곳, 파도치는 심연 () 거기 물속의 나는 울지 않습니까 다시는 물 밖의 생을 꿈꾸지 않기로 했습니까 -------------------------------------------------------------------- 물속의 나는 울지 않습니까, 라는 제목은 의문문. 화자가 청자에게 질문을 하여 그 해답을 요구하는 문장이지요. 해답은 들려오지 않고 우리의 의문만 짙어져 갑니다. 모든 울음이 태어나는 곳 그곳은 물속의 생이 걷는 법을 배우는 곳이기도 하지요. 누군가 최초의 발자국이 생기고, 최후의 후회가 생기는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습니다. 그 뒷모습에 쓰여 있는 긴 역사. 내내 말을 내려놓고 울음을 내려놓고 모두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4 4월 엄원태 (……) 어느 봄날엔가, 당신이 까닭 없이 서러워져 홀로 들길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때, 저 외진 지상의 별무리들에게 그렁그렁 어린 눈길을 주었던가. 그래선지 오늘 내가 거기서 왠지 서러운 빛깔의 메시지를 전해 받는다. 슬픔도 저리 환하다. -------------------------------------------------------------------- 간절히 바라고 원했습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적 정언이 맞지 않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어느 봄날” 그러니까 지난 ‘세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까닭 없이 서러워져 홀로 들길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때”를 말이지요. 무슨 연유인지 당신은 곁에 없고, 혼자된 시인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저 외진 지상의 별무리들에게 그렁그렁 어린 눈길을 주었”을 당신에 대해 말이지요. 아직 차가운 봄 바다, 새로운 별무리가 새겨졌다는 비보(悲報). 이제 당신이라는 청춘 대신, 우리만 남아 ‘세월’을 견뎌야 합니다. 서늘한 예감의 순간에 보내온 ‘사랑해’라는 메시지,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빛깔의 메시지”임에 틀림없지요. 차마 “슬픔도 저리 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3 소만(小滿) 나희덕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 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 소만(小滿)이라는 말 참 좋지요. 꽃이 가고 잎이 오는 절기. 언젠가부터 꽃보다 초록이 더 좋아지더라는 당신의 말을 기억합니다. 초록에게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때가 있듯, 우리는 무엇으로 이 세상을 채워나가야 할까요. 오랜 꿈인 “조금 빈 것도 같게/조금 넘을 것도 같게”의 경지란 쉽지 않네요. 허공에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약속처럼 “마음의 그늘도/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가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2 철수와 영희 윤제림 철수와 영희가 손 붙잡고 간다 철수는 회색 모자를 썼고, 영희는 빨간 조끼를 입었다 바둑이는 보이지 않는다 분수대 앞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는 창식이 앞을 지날 때 영희가 철수의 팔짱을 낀다 창식이는 철수가 부럽다 철수와 영희가 벤치에 앉아 가져온 김밥을 먹는다 철수가 자꾸 흘리니까 영희가 엄마처럼 철수의 입에 김밥을 넣어준다 공원 매점 파라솔 그늘 아래 우유를 마시던 숙자가 철수와 영희를 바라본다 숙자는 영희가 부럽다 일흔두엇쯤 됐을까 철수와 영희는 동갑내기일 것 같고 창식은 좀 아래로 보인다 물론, 영희와 철수는 부부다 -------------------------------------------------------------------- ‘철수와 영희’ 이야기. 둘이 사이좋게 “손 붙잡고” 걸어가요. 교과서에서의 모습 그대로 회색 모자와 빨간 조끼가 눈에 익습니다. 서운하게도 “바둑이는 보이지 않”네요. 인생은 타이밍, “창식이 앞을 지날 때” 기다렸다는 듯 “영희가 철수의 팔짱을” 낍니다. “창식이는 철수가 부”러울 뿐. 약속처럼 둘은 “가져온 김밥을 먹”기 시작해요. “철수가 자꾸 흘리니까 영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1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지금은 김수영 시인을 호명해야 하는 시간. 봄밤, 시인은 당부인지 명령인지 모를 첫 문장을 적습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무엇보다 서두름을 경계하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는 “혁혁한 업적”도 “바라지 말라”고 말합니다. 삶의 목적을 출세에 두는 이들은 서늘하겠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0 좋은 풍경 이시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강화유스호스텔 마당 한켠, 함민복 시인이 먼 곳에서 올라온 친구들을 먹이려고 삼을 넣은 닭백숙 두 마리를 해 왔다. 제주에서 올라온 김수열 시인이 그것을 뜯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동안, 나무 그늘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그는 저무는 하늘을 향해 선한 미소만 실실 흘리는 것이었다. -------------------------------------------------------------------- 제목 그대로 ‘좋은 풍경’이 담긴 시 입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시적 순간은 ‘어스름’의 때인 것 같아요. 그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강화유스호스텔 마당 한켠”에서의 한 때입니다. “함민복 시인이 먼 곳에서 올라온 친구들을 먹이려고 삼을 넣은 닭백숙 두 마리를 해 왔”네요. 잘 알려져 있듯, 충청도 출신인 함민복 시인은 벌써 오래전 강화도로 건너와 닻을 내렸답니다. 그곳에서 아내와 꾸려가는 작은 인삼 가게, 오늘의 닭백숙 한 그릇에는 한 시절이 담겨있겠지요. 그는 “주민등록등본 내 이름 밑에/당신 이름 있다고 신기해 들여다보던/밤이면 돌아와 인삼처럼 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9 산수유꽃 신용목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를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기 전 가끔은 돌이켜 아픈 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저 뜨거움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임을 안다 마당귀에 산수유꽃이 피는 철도 독감이 잦아 옆구리에 화덕을 끼고 자다 나는 정년(停年)이 되어 버렸다 노비의 뜰에나 심었을 산수유나무 면도날을 씹는 봄 햇살에 걸려 잔 물집 노랗게 잡힐 적은 일없이 마루턱에 앉아 동통을 앓고 문서처럼 서러운 기억이 많다 한 뜨거움의 대를 유배시키기 위해 몸이 키우는 물집 그 수맥을 짚고 산수유가 익는다고 비천하여 나는 어깨의 경사로 비탈을 만들고 물 흐르는 소리를 기다리다 늙은 것이다 시간의 문장은 흉터이다 둑 위에서 묵은 편지를 태웠던 날은 귀에 걸려 찢어진 고무신처럼 질질 끌려 다녔다 날아간 연기가 남은 재보다 무거웠던가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만큼 아득했으며 나는 천한 만큼 흉터를 늘리며 왔고 데인 데마다 산수유 한 그루씩이 자랐다 -------------------------------------------------------------------- 봄꽃에 화사하다, 라는 수식을 즐겨하는 당신이라면 당혹스러울 시이겠지요.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8 동백이 활짝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남도에서 온 안부를 전해요. 동백이 피고 있습니다, 라는 문장은 산 넘고 물 건너는 사이 적잖이 붉어졌겠지요. 우리는 상춘객이 되어 벌써 동백 원림에 서있습니다. 세상이 잘못되어갈수록 꽃을 보고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동행을 자처한 시인은 풍경번역가, 뜻밖에도 사자와 동백을 마주합니다.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피웠”네요. 보이지 않는, 보이는 “허공으로의 네 발” 그리고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식물적 상상력에 더해진 짐승의 발과 갈기라니요. 한 호흡 쉬고 이어지는 목소리,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는 다짐이 결연합니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말이지요. 어쩌면 ‘동백꽃이 저 바람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생각해보면 모든 꽃 앞에서 결연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풍경번역가 대신 상춘객이 세상을 향해 읊조리네요. ‘나는 어서 인생을 완성해야만 한다’. 저만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7 화남풍경 박판식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우리는 오늘 ‘화남’으로 떠납니다. 그예 ‘화남풍경’이 되어볼까요. 사실 이 시공간은 실제 지명이기보다 심상지리(心象地理)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요. 시 속에는 상인과 어미 당나귀, 새끼가 등장합니다. “상인은/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어요.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말입니다.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고요. 과거시제는 곧 아득한 시원(始原), “세상으로 가는 길”로 열려있습니다. 아껴두었던 첫 구절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은 결구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와 비로소 만납니다. 참조점이 되어줄 시인의 산문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언제부턴가 나는 인생을, 얇은 물의 막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