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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부리시첩 _ 훈민정음(訓民正音), 한글로 사나운 민심들 바로잡으시길…

이경철 시인

<초부리시첩(草芙里詩帖) 1>

훈민정음(訓民正音), 한글로 사나운 민심들 바로잡으시길…

용인시(龍仁市) 처인구(處仁區) 모현면(慕賢面) 초부리(草芙里)에 둥지 튼 지 반여 년. 이른 봄에 와 여름 지나고 이제 가을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다. 초록마을 길이 끝나는 집으로 이사 오던 날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하늘에 초승달이 샛노랗게 떠올랐다. 이어 하나 둘 눈뜨는 별, 별들. 그래 이 새로운 거처를 ‘달과 별의 계곡’이라 부르니 마을로 들어설 때 여기저기 눈에 띄는 소규모 공장들에 심란하던 마음이 적이 안심이 됐다.

마당에 철쭉꽃이 붉게 피어오르자 산이 무너져라 꿩, 꿩 울던 꿩들이 조심조심 집 앞까지 내려왔다. 볏과 깃이 꼭 철쭉꽃 색깔인 장끼 옆에는 꼭 까투리 한 마리도 함께 했다. 들고양이가 삵 같은 사냥 본능에 낮은 포복으로 야금야금 다가서면 훌쩍 날아올라 쫓아버리던 그 우렁찬 꿩 소리에 봄날은 가고.

목련이며 철쭉, 모과꽃이며 찔레꽃, 텃밭의 감자꽃이며 쑥갓꽃 이울고 묵정밭에 하얗게 망초꽃 피어오르며 여름이 왔다. 흐드러진 망초꽃 사이사이 노란 달맞이꽃 피어오르더니 고라니들도 한두 마리씩 산에서 내려와 달맞이꽃 같은 귀를 세우고 큰 눈망울로 사방을 경계하며 놀다들 갔다.

무더운 여름밤 눈이나 시원스레 씻으려 망초꽃밭 둘러보니 아, 어둠 속을 반짝이며 나는 망초꽃들, 아니 가만히 들여다보니 반딧불이이다. 무더운 밤 심심한 망초꽃밭을 깜빡, 깜빡 날고 있는 반딧불이들. 저, 저 아득한 유년 신화 같은 날들의 윤무(輪舞)라니! 그런 망초꽃, 반딧불이 다 꺼진 풀숲에 대신 풀벌레소리 심란하게 반짝이며 가을이 왔다.

새파란 하늘에 하늘색 빼닮은 쑥부쟁이며 들국화 피어오르며 가을이 와서 우리들 곁에 있다. 텅 비어가는 하늘 아래 먼 길 에두르며 온몸을 출렁이는 코스모스들. 피부에 와 닿는 삽상한 기운이 하염없는 그리움으로 들국화며 코스모스, 가을꽃들을 피우고 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가수 송창식씨가 한창때 기타 둘러메고 서정주 시인을 찾아와 노래 불러주며 가사로 쓸 수 있게 허락받았던 시「푸르른 날」이다. 눈부신 햇살에 단풍 그림자 어리는 계절, 이 시만 보면 그리움이 환하고 애틋하게 물들어온다. 한글 아니면 흉내 낼 수 없는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에 이르면 5음보 율격(律格)과 풍격(風格)에 절로 탄성 터진다. 독자들의 가슴속을 시인과 한가지로 그리움 가득 물들이는 것, 이게 시의 가장 좋은 효험 아니겠는가.

“어린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이렇게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세종대왕이 펴낸 글자가 훈민정음, 즉 백성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소리가 한글이다.

한글 28자의 자음과 모음에는 우주의 운행이치와 형상이 다 담겨있다. 하매 사람들은 물론 우주 삼라만상을 다 소통시키고 운항시킬 수 있는 소리이다. 해서 단군이래의 우리 민족정신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이 고스란히 담긴 글자이다. 내가 이글 앞에 주소를 굳이 한문과 같이 쓴 것도 한글의 미덕을 살피기 위해서이다.

용인시 처인구에는 한자로 어질 인(仁)자가 두 개나 들어간다. 인이 머물러 있고 더구나 그 어짐을 사모한다는 모현(慕賢)면이니 얼마나 어진 동네인가. 물론 한자의 뜻을 알아야만 그 어진 동네라는 개념을 붙잡을 수 있다. 그러나 ‘초부리’에서는 그런 뜻이니 개념보다 말소리가 그냥 예쁘게 들어온다. 한자로 풀어 풀 좋고 부용이 예쁘게 피어나는 동네면 어떻고, 나무꾼 마을, 초부(樵夫)리면 어떠랴.

그냥 초부리 하면 양성, 음성, 중성 모음이 차례로 어울려 우주가 순하게 화통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우리 한글은 양성의 하늘, 음성의 땅, 그리고 중성의 인간이 어우러지는 소통으로 만물을 순하게 낳고 기르고 다스리는, 홍익인간의 소리인 것이다.

그런데도 요즘은 들리는 말들이 너무 사납다. 특히 공론의 장, 말들이 한결 순화되어 들려야할 신문이나 방송의 말들이 바르고 어질고 밝지 못하다. 물론 정치판이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행태에 따라 사나워진 민심이 그대로 반영된 탓이다. 우주 삼라만상을 널리 이롭게 하려 나라를 세워 하늘을 열고, 그런 홍익인간 마음으로 글과 말을 지은 이 10월 상달에 훈민정음 정신을 다시금 새겨 인심과 말을 순하고 가지런히 할 일이다.



   
이경철(李京哲)시인

1955년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문예중앙』, 랜댐하우스, 솔출판사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을 발표했다. 2010년『시와시학』으로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만해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대중문학과 대중문화』,『천상병을 말하다』와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 명화 100선 시화집『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시가 있는 아침』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