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7 (토)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이경철 시인의 초부리 시첩詩帖 5-입춘 지나 설날과 우수로 가는 2월, 순정한 새봄을 위해…

이경철 시인의 초부리 시첩詩帖 5

입춘 지나 설날과 우수로 가는 2월, 순정한 새봄을 위해…

   
2월처럼 밋밋하고 허탈한 달도 없을 것이다. 작대기 두 개, 가을과 겨울 사이에 허허롭게 껴있는 달이 11월이듯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그 사이에 껴 참 밋밋한 달이 2월이다. 정초의 작심(作心)이 무너져 그저 세월 속으로 흐르는 달이 2월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올 2015년도 달력을 보시라. 입춘이 있고 설날이 있고 꽁꽁 언 북녘 강물도 풀리는 우수도 들어있다. 전년도엔 설날보다 한참 뒤쳐졌던 입춘이 설날 앞서 갔고 설날은 또 우수와 겹치고 있지 않은가. 지각한 절기를 작년 윤달로 다 청산하고 올해는 일찍, 제철을 맞고 있지 않은가.

찬바람 맞고 있는 매화도, 언 땅속의 마늘도 꽃과 이파리를 틔울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2월이야말로 천지간 삼라만상의 시작일 것을. 바람은 차도 따스하도록 환한 햇살 속에는 이미 봄이 와 있지 않은가.

이곳 초부리 전원 속으로 이사한 이래 나는 24절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분명 감지하고 있다. 도심에서 포은대로를 달려 귀가하며 산 능선으로 커다랗게 떠오르는 달들이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변해가는 형상들을 보면서, 새벽하늘 별자리들의 위치를 찾으면서 우주 삼라만상의 운항과 나도 괘를 같이 하고 있음을 살갑게 느끼고 있다.

먼 산 가까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동녘산자락 끝 집이라 해가 늦게 떠오른다. 겨울에는 9시 다 되어서야 동산에 해가 떠오를 기미를 보이면 서산자락 자작나무 군락 높은 가지 가닥 가닥들이 먼저 햇살을 감지하고 빛살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햇살이 차츰 차츰 더 내려오며 환히 비추는 아랫도리를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아, 자작나무들이 껍질을 벗겨내며 찬바람 속에 날리고 있지 않은가. 희어져라, 더 희어져라 생살을 피나게 벗겨가며 제 몸과 마음을 백옥처럼 희고 정갈하고 귀하게 가꾸고 있지 않은가. 그래 동틀 녘 자작나무의 그런 풍정(風情)을 일단 이렇게 시화(詩化)하고 제목은「자작나무-초부리 시첩詩帖 5」라고 달아봤다.

튼실하게 자리 잡은 뭇별들 사그라지고
샛별만 겨우 남아 시린 새벽 겨울하늘.
희붐하게 동터오는 초부리, 눈 덮인 썰렁한 산야에
웬 눈의 요정인가,
매끈하게 치솟아 오른 저, 저 자작나무들.

가도 가도 안 끝나는 하얀 세상 러시아 설원.
오줌 누러 내린 자작나무 처녀림 그 미끈한 아랫도리에
뜨거운 오줌발 절로 굵어지는데,
아, 하얀 수피(樹皮) 겹겹 피나게 벗겨가며 백옥처럼 더 환해져가던
그때, 그 러시아 자작나무 눈부신 처녀들.

온갖 귀신 이야기들 문풍지 매섭게 때리는 유년의 겨울밤.
햇살 환히 떠오르면 가웃가웃 함께 날려 보내던 가오리연
끈 떨어져 눈 시린 빛살 되어 날아가던 그 때 그 연들.
그 처녀, 그 연들 눈 정령 되어
오늘은 초부리 겨울 희디 흰 저 자작나무로 불끈 서 있는 것인가.


소련이 붕괴되고 연방들이 독립해 차츰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되고 있던 러시아를 여행한 적이 있다.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하며 설원에 서있는 자작나무 군락을 끝도 없이 봤었다. 차라리 눈보다 더 흰 자작나무들을 보며 지금도 TV에서 되풀이 방영되곤 하는 명화 ‘닥터 지바고’ 영상들이 떠올랐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혁명에 나섰다 설원에서 쓰러져간 수많은 순정한 목숨들, 닥터 지바고의 인간적이면서도 로맨틱한 사랑의 영상과 서사가 자작나무에 겹쳐졌다. 그와 함께 비록 관료화되고 부패해 붕괴됐지만 그들이 애초에 꿈꿨던 무등(無等)한 평등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자존의 고귀함이 자작나무에서 떠올랐다. 이 허망하고 부박하고 염치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이었던 공산주의의 그 순결한 이념은 겨우 자작나무로만 서 있는 듯 보였다.

페테르부르크 네바강변에선 결혼식장을 막 빠져나온 신랑 신부와 들러리 아가씨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일행들과 한참을 강변에 앉아 속살까지 훤히 비칠 듯한 백옥 같은 피부의 미끈한 그 아가씨들 감상에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 그 자작나무와 아가씨들이, 거기에 내 유년의 정결한 꿈의 끈 떨어진 연들이 오늘은 초부리 자작나무로 저렇게 우뚝 서 있는 것인가.

그래 며칠 후면 설날이다. 한 해의 진정한 시작이다. 그래서 1월 1일 신정 때는 단 하루만 쉬었지만 설에는 앞뒤로 3일이나 쉬는 게 아닌가. 정초에 잡았던 마음 다시 한 번 다잡을 일이다. 나의 순정과 순정한 공동체를 위하여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순정을 돌아볼 일이다. 또다시 새봄을 순정하게 맞기 위해 피나게 오염된 구각(舊殼) 벗고 있는 저 자작나무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