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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65 l 샤퍄 연필깎이 l 심재휘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65

샤퍄 연필깎이

심재휘


사춘기는 수식어가 없는 밤이다
열여섯을 앓고 있는 딸이 눈물방울을 떨구고
아직은 식지 않은 여름밤에
선풍기는 소리 없이 돌고
나는 연필깎이로 샤파 샤파 연필을 깎는다
연필은 어둠 속에다 무엇을 쓰려는 걸까
선풍기는 고개를 좌우로 젓기만 하고
나는 연필깎이를 적당히
정말 적당하게 힘을 주어 돌리는 오래된 손
아빠의 달은 창밖을 공전하고
딸의 별빛은 너무나 희미하고 이 넓은 우주에서
샤파 샤파 아프게 깎고 깎이는 연필의 밤
셀 수 없는 몇 자루의 밤을 몸 안에 품고 오늘은 딸이 운다
그럴 때면 나는 뭉툭하고 눈물이 그렁한 연필을 연필깎이에 넣고
길고 까만 심이 나오도록 손잡이를 돌리는데
살살 돌리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는 나의 손에는
얇고 구불구불한 눈물의 밥만 가득한데
연필의 내심(內心)이 제법 뾰족해져도 나에게는
열여섯 사춘기를 베껴 쓸 수 있는 연필이 끝내 없다
서글픈 딸의 봄밤은 작고 가지런한 그녀의 발등 위로
수식어도 없이 한 방울씩
툭툭 떨어져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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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저녁별이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함께 읽고 싶은 오늘의 시. 슬프고 아름다운, 아름답고 슬픈 풍경이 그려져 있지요. “사춘기는 수식어가 없는 밤”. 수식할 수 없기 때문에 수식어를 갖지 못한 시간. 딸이 눈물을 떨구는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아빠는 그저 연필을 깎습니다.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샤파 샤파 아프게 깎고 깎이는 연필의 밤”이 깊어갑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는 “연필의 내심(內心)”이 존재하고 있지요. 그 내심에 가닿는 일이 어떤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여섯 사춘기를 베껴 쓸 수 있는 연필이 끝내 없다”는 고백적 탄식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는 명제를 떠올릴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지금 반짝이는 것은 저녁별과 밑줄 긋고 싶은 미문, 당신의 내심일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어른은 영원히 사춘기를 앓는 어른아이.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