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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74 l 걸음 l 차성환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4


걸음

차성환


걸음은 걸으면서 걸음마다 피는 꽃들과 녹아내리는 얼음을 생각하고 방향이 없이 방황하는 걸음은 구두 뒤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른 걸음이 올 것 같은 골목에 서서 걸음 속에 걸음이 왼발과 오른발이 번갈아 움직이면서 엉덩이와 어깨가 춤추듯이 흔들리는 길을 따라 흘러가는 걸음의 리듬을 기다리는데 나는 걸음을 가두는 걸음에 갇힌 채 걷지도 못하고 바다로도 가고 싶은 걸음이 산에도 못가고 집에도 못가고 걸음을 포기하고 걸음으로 남아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걸음을 자책하며 눈물을 흘리고 걸음이 흘러내리고 녹아내리고 바닥에 스며 새로운 걸음을 완성할 때까지 또 다른 걸음을 꿈꾸는데

계단을 오르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걸음을 따라 걸으면 죽은 걸음이 온통 가득 넘쳐 출렁이는 걸음의 파도 걸음의 슬픔 걸음의 얼음 걸음의 덧없음 걸음의 넘어짐 움직이지 못하는 걸음 그대로 압정으로 벽에 꽂아 걸음을 걸어놓고 걸음걸이를 감상하고 그러고 보면 걸음은 걸음을 멈출 때 가장 걸음에 가깝고 걸음은 내 시의 거름이 되어 치사하게 머릿속에 얼어붙은 걸음으로 시를 쓰고 나를 여기서 저기로 옮겨주는 걸음은 문이 없는 걸음으로 걸음을 끝내려고 뛰어내린 사람들의 걸음은 죽음 주검 무덤 까마득한 바닥의 정지 꽃 검은 얼음 나는 나를 죽음에 걸음 정지 멈춤 고 스톱 차렷 멈추고 스톱 영원히 지속하는 걸음 찰나의 시간과 무한한 시간의 깊은 울음 감금 설움 시름 걸으면서 노래하고 걸으면서 춤을 추고 걸으면서 속삭이고 걸으면서 같이 걷고 걸음 속에 꽃이 피고 걸으면서 진짜 걸음이 되고 나는 가장 화려하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걸음이 되어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지상의 걸음을 걸으며 그렇게 걸음마다 나를 심어놓는 걸음이 어떻게 스스로 무너뜨리는지 지켜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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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책보다 산책의 계절. 투명에 가까운 하늘색이 머리위에 펼쳐지는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오늘의 시는 차성환 시인이 들려주는 ‘걸음’ 이야기입니다. 그의 시편들은 일상의 세부를 밀착 인화할 수 있는, 섬세한 관찰력의 차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시적 대상을 소묘하면서 그 이면의 침묵에서 들려오는 미적 가치를 구축하고 있지요. 시적 주체가 “새로운 걸음을 완성할 때까지 또 다른 걸음을 꿈꾸는” 것처럼, 시인은 ‘새로운 시를 완성할 때까지 또 다른 시를 꿈꾸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움직이는 두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점은 현재의 ‘여기’에, 다른 한 점은 미래의 ‘저기’를 향해 있겠지요. ‘여기’에서 ‘저기’로 점선을 그리고 있는 한 시인의 발자국. 이러한 유동성은 시 전반에 출렁이면서 아름다운 라임까지를 들려줍니다. 치열하게 구축한 세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 그러한 용기를 통해 날마다 새롭게 펼쳐질 시인의 시적 지형도.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