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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철 초부리 시첩

   
다시 0살 환갑 맞는 이 입춘(立春)절기 항심(恒心)을 위해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1월 다가고 이제 2월이다. 정초엔 세배며 이런 저런 신년 모임으로 바빴다. 좋은 이야기들이 덕담으로 오갔고 으레 술도 따랐다. 특히 올 정초엔 환갑도 따랐다. 환갑이야 요즘 같은 100세 시대 남사스러워 명함도 못 내민단다.

그래도 태어난 지 60년, 한세월 돌아 갑년으로 돌아와 다시 태어난 날 그냥 넘길 순 없었다. 그래 가까운 동무들 불러 모아 또 마셨다. 그러나 그렇게 마셔대도 뭔가 허전한 마음 구석 채울 수 없었다. 그래 지난 여남은 날은 두문불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다시 0살 된 기분으로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보려 했다.

그러나 웬걸, 엊그제 50줄에 접어든 후배가 서울에서 이곳 초부리까지 찾아와 기어코 불러내고 말았다. 공무원인 직장도 작파하고 또 무엇도 때려치우고 이제 저대로 살아보겠다며 막무가내로 마셔댔다. 그러기 전 꼭 한번 만나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려 왔다는 후배를 이리저리 달래며 나 또한 막무가내 취해갔다.

그런 후배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니 마침내 술병이 도져왔다. 정초부터 쌓인 술을 쏟아내려는가, 배탈로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하도 쏟아내다 보니 머리까지 혼미해져 찬바람 좀 쐬려 신새벽 2층 테라스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날씨 탓인가. 하현으로 기울어져가는 달이, 그것도 달무리 가득 흐리멍덩 취한 별들을 데리고 놀고 있다. 겨울새벽 한기는 빈속을 사정없이 파고드는데. 그런 새벽하늘과 엄동설한 추위가 환갑 지나 다시 0살 애기가 된 내 처지는 아닐는지. 하여 ‘건달’이란 말이 불현 떠올랐다.

건달은 오늘도 춤추고 노래 부른답니다 수미산 금강궁전 하 답답해 좋은 일 궂은 일 굿판마다 돌아다니며 춤추고 노래 불렀답니다 산해진미 내 다 싫다 구름 같은 담배 피우고 이슬 같은 술 마시며 놀았답니다 그 춤 그 노래에 아수라장 세상도 아연 살맛났답니다 그런 놀음 공덕 쌓고 쌓아 제일 높은 하늘세상 신이 됐답니다 뜬구름 같은 세상 풍월로 다스리는 건달바 부처님 됐답니다 한여름 땀 흘리며 남들 다 일할 때 시원한 그늘에서 흥타령만 불러준 이솝 건달 베짱이는 겨울 되자 굶어서 죽었다는데……

깜깜한 하늘에선 달무리 가득한 달 향피리 불며 취한 별들과 노닐고 얼어 죽을 이 엄동설한은 뼛속 시린 문풍지로 우는데…….

60고개 넘어서도 자신을 둘러보고 보살피지 못하고 술병 난 이 내 신세가 건달 같았다. 저 흐릿한 밤하늘의 달무리와 물 잔뜩 머금어 흐리멍덩한 별들 같고 추운 날 예비 못한 베짱이 같았다. 그래 이런 신세타령 식으로 단숨에 쓰고 나서 제목은 ‘건달바’로 달았다.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며 혹은 난동이나 부린다는 ‘한량’과 ‘깡패’의 뜻을 품은‘건달’이란 말은 불교 산스크리트어 ‘간다르바’에서 왔다. 수미산 금강굴에 살면서 향(香)만 먹으며 부처님이 설법하는 자리에서 춤과 노래로 설법을 찬탄하고 그것을 불법(佛法)으로 수호하는 신이다. 이런 좋은 신이 지금 우리들에겐 졸지에 건달이 된 것이다.

그렇게 건달의 뜻을 새기니 이솝 우화 속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도 새롭게 들려왔다. 남 신나게, 일 잘 하게 흥타령 불러준 베짱이도 공동체 삶에선 아주 좋은 역할 아닐까 하고. 그런 베짱이, 소위 ‘고문관’들이 이 추운 날 굶어죽는 시대는 그만큼 더 우리네 삶이 삭막하고 팍팍할 거라고.

건달과 베짱이는 그래서 한 통속일 텐데, 불교에서 건달은 많은 권속을 거느린 아주 높고 좋은 신으로 모셔지지만 아, 그러나 베짱이는 굶어죽는 우리 시대 이 냉혹하고 엄정한 현실은 어떡할 것인가.

아, 그러나 또다시 엄동설한의 이 한기와 막막함도 곧 끝나리. 내일모레면 입춘이고 곧 이어 설날 아닌가. 이지러진 달도 곧 차올라 대보름이면 달집과 함께 묵은 회한도 다 태워버리고 새로 새 해 농사를 시작해야할 것 아닌가.

환갑 나이 또한 절기로 치면 이런 입춘 무렵일지니.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0살. 한 사람이 태어나 한 우주를 열었듯, 이제 세상을 열게 한 자신을 둘러볼 일이다. 그동안은 세상에 섞여, 세상을 위했다면 이제 나 자신을 둘러볼 때이다.

세상에 섞여 아등바등 짜증도 내고 때론 울기도 했을 나 자신을 위할 때이다. 남들보다 이젠 나 자신과 놀고 싶다. 이번 입춘부터는 이 세상을 열게도 하고 닫게도 할 내 자신의 그 한량없는 속내와 노는 건달바 되어 세파에 아랑곳 않는 항심(恒心)을 일궈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