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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93ㅣ청혼ㅣ진은영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3

청혼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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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특별한 ‘청혼’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 따로 있는 게 아니겠지만, 봄은 모든 사랑의 적기처럼 느껴집니다. 별들이 “벌들처럼 웅성거리”는 봄밤의 풍경이 떠오르지요. 여름날의 비를 주겠다는 밀어까지. 고요한 선언이 이어집니다.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시간에 아첨하지 않은 자는 세상에도 아첨하지 않으며 살아왔겠지요. 과연 “우리가 했던 맹세들”이 지켜질 수 있을까요. 서로를 찾느라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준다니요. 그 시간까지 헤아려 주신다니요. 이어서 벌들이 “별들처럼 웅성거리”는 풍경. 그런데 조금 더 귀 기울여서 들어야 하는 ‘청혼’인 것 같습니다. 결구,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무슨 잘못된 역사가 있었던 걸까요. 왜 인류도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세상의 쓴 잔을 모두 마셔야 하는지. 늘 그렇듯 생은 왜, 라는 질문 앞에서 묵언수행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만은 아껴두자고 봄날과 약속.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