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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95ㅣ슬픔이 없는 십오 초ㅣ심보선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5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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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픔에 관해 말하기 전에 다음의 문장들을 살펴보기로 해요. ‘절망의 심미가’인 에밀 시오랑은 적고 있습니다. “철학은 슬픔의 독을 풀어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철학에 깊이가 있다고 믿는다. 철학의 잘못은 너무 참을 만하다는 것이다.” 너무 참을 만하는 것…. 시인은 치욕 없는 세상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세상을 견디는 방식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탄생시킵니다. 그 순간은 가끔 찾아올 뿐. 변명과 휘어짐 그리고 그림자와 침묵이 동반되는 시간. 이제 끝내 부정하고 싶은 문장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됩니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봄, 꽃으로부터 오고 꽃으로부터 지는 절기.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는 보는 일. 문득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을 떠올려 보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속 5센티미터로 지는 꽃잎이여 대답하라, 투명한 슬픔이 도착하는 때를.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