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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5월이
온몸으로
약동하고 있는데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집안 좁은 공간에서 새벽체조 대신 마을 뒷산 까마귀봉에 오른다. 마을을 감싸는 산등성을 오르내리며 떠오르는 해와 함께 산과 흙과 나무들이 부스스 깨어나는 기척을 느낀다. 온갖 새 등 만물이 깨어나는 즐거운 소리들을 듣는다.
매화며 개나리 진달래 할미꽃 목련꽃 벚꽃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더니 가뭇없이 저버렸다. 절정에서 하르르 하르르 지는 벚꽃들을 보며 ‘올봄도 또 머물지 못하고 가느니’ 하는 감상에 빠져들다 문득 고개를 드니 산이 빛났다. 옥빛 푸르름이 울긋불긋 꽃보다 훨씬 예쁘고 신선했다. 미사여구나 허풍 없이 신생과 청춘이 구체적 실감으로 다가왔다.
오늘도 5시 20분, 새벽 3시께 일어나 집필에 골몰하는 창밖 은행나무 가지에 동박새 한 마리 날아와 반갑게 우짖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극심한 가뭄 속을 날다가 그만 기력이 다해 떨어진 동박새 한 마리 잘 보살펴 날려 보낸 적 있다. 그랬더니 지난겨울부터 해 뜰 기미만 보이면 그 햇살 물고와 울고, 서산에 해 넘어 갈 때쯤엔 노을자락 물고 와 우는 새. 난 그때 살려준 동박새가 조석으로 문안인사 하는 것으로 치고 있다.
며칠 전부터 그 동박새를 따라 동네 야산 능선 제일 높은 봉우리 까마귀봉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서면 동박새는 산 길목 길목 나무 위에서 우짖으며 길잡이 노릇을 한다. 설악산 수렴동 계곡 지나 봉정암 오를 때 쪼르르 쪼르르 달려나와 제 구역 길잡이 노릇하던 다람쥐들처럼.
동박새 울음에 산도 깨어나고 찌르레기도 깨어나고 때까치도 깨어나고 시끄럽다까악하며 까마귀도 깨어난다. 그러면 딱따구리들이 딱또르르르르 부지런히 목탁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밥벌이를 시작한다.
아니 깊은 잠에 든 만물을 깨우는 첫소리는 휘파람새 울음이다. ‘휘으이’ 하는 자음도 제대로 못 갖춘 모음으로만 되가는 소리. 밤새 소쩍새가 ‘솟쩍 솟쩍’ 두음절로 딱 부러지게 울다 목이 메어 그만 ‘소으쩌그’하고 사그라지고 나서 처음 들리는 새소리가 초부리에선 휘파람새 울음이다.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며 참았던 숨처럼 새어나오는 소리로 휘파람새가 신호하면 이른 닭 울고 동박새는 내 창에 날아와 지저귀기 시작한다. 그런 만물이 깨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제대로 깨어나기 위해 새벽 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책상머리 켜켜이 묵은 궁상들을 털털 털어내고 첫새벽 맞는 기쁨으로만 채우기 위해.
까마귀봉에 오르니 저 산 등성이 너머에서 해가 막 떠오르고 있다. 내 방에 있으면 두어 시간 뒤에야 들어올 햇살이 비치고 있다. 내 작은 동박새도 이 동살을 물어와 내 창에 부리며 그리 기쁘게 지저귀었을 것이다. 딱따구리가 또 나무를 부지런히 쪼고 있나보다. 발소리 들릴락 말락 할 지척에서 들리는 그 소리가 이번엔 못 박는 전동드릴 소리 같이 빠르고 힘차다.
캄캄한 새벽 휘이익, 후-
어둠을 부는 휘파람 새소리 들리더니
동녘 하늘 빛 터오는 기운 보이데요.
이른 새벽 온갖 잡새들 울어쌓더니
동네 닭들 덩달아 목청껏 울어쌓더니
엉켰던 하늘과 땅 사이 희붐하게 열리데요.
동터오자 딱, 따르르르륵 천지를 진동하는 전동드릴 소리
하늘을 다시 뚫고 땅에 전동 못 총질해대는 딱따구리
천지공사 벌이고 있네요.
목청은 왜 뽑아, 울긴 왜 울어 잡것들
온몸으로 이렇게 쪼고 먹고 먹이는 소리가
천지간에 생겨난 첫소리라 가르치고 있네요.
만물이 깨어나는 새벽 소리, 특히 그 딱따구리 소릴 들으며 '딱따구리 천지공사(天地公事)'란 제목으로 착상한 시이다. 만물들은 상생(相生)으로 깨어나는 즐거움을 서로 지저귀고 서로 나누고 있는데 저버린 꽃처럼 궁상떨고 있는 나를 깨우려 써본 시이다. 새롭게 펼쳐지는 신록과 생명의 약동을 노래하는 계절, 5월이 우리네 온몸으로 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