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백석역
최서진
도시를 지나 대곡역과 마두역 사이
지혜가 없어져서 날은 저무는데
눈은 오지 않고 도깨비의 얼굴을 닮은 바람이 분다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바쁘게 지나가고
절벽의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연인들은 손을 놓고 사라진다
나는 홀로 눈물이 나
기다려도 오지 않을 당신 때문에 울컥 목이 메인다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지 않는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나타샤가 오지 않아도 괜찮지만
자꾸만 계단 쪽으로 눈이 간다 계단은 홀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저녁이면 무엇이 백석으로 오게 하는가 백석을 지나 대화로 가는 지하철을 길게 바라본다 지하철이 지나가고 지하철이 또 지나간다 기다림이 지나간다 기다린다는 것은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일 충분히 좋은 일 분별을 잃은 눈으로 조용한 역사에 서 있다
손을 녹이려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마신다 입가에 고인 검은 기억이 속으로 들어가자 서러워진다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안고 앉아서 천천히 마신다 도무지 기다림을 참을 수가 없지만 이런 것은 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얼어붙은 자세로 기다림을 기다린다
누군가 시간의 반대편에서
아무로 모르게 달려오고 있으니
나는 외로워할 까닭이 없다
기다림은 지독하게 나를 위해 올 것이다
백석역 유리창 너머 하늘에서
눈이 오고 흰 별이 뜬다
* 백석의「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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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 시인의 읊조림과 같이 세상에 밤이 내리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부족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차오르는 지혜는 저만치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오래전 백석이 그러했듯 시인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나타샤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계단 쪽으로 눈”길을 보내는 인간이라는 아름다운 종(種).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어서, 사랑이어서 그러하겠지요. 우리는 어느새 백석역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더디게 온다, 라는 말이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림을 기다”리는 것. 그 기다림 마저 애정한다면 어쩌면 그 사랑은 늘 현재진행형이겠지요. 저만치, 한 사람이, 한 사랑이 “시간의 반대편에서/아무로 모르게 달려오고 있으니/나는 외로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이어서, 우리가 우리라서 눈부신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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