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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류희·이사주당 진면목 널리 알려 졌으면”

류래호 진주류씨 목천공파 종친회장

류래호 종친 회장

 

문통을 오늘날 현존하게 한 류근영 독립운동가

 

문통(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경기도문화재 등재가 생애 최대 과업… 현양사업 촘촘히 진행
류희 관련 국내학계 연구 집대성·이사주당의 가장도 다시 완역

 

[용인신문] 100여권에 이르는 거질 ‘문통’을 저술한 조선후기 실학자 류희와 류희의 어머니이자 ‘태교신기’를 저술한 이사주당은 불후의 역작을 남긴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학계와 관심 있는 몇몇 사람들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은 용인 모현면 일산리 일대에 세거했던 진주류씨 목천공파가 배출한 용인 출신의 대학자들이다.

 

특히 류희는 ‘문통’이 발견될 당시 정약용, 이익 반열의 학자로 주목 받았으나 전모를 밝히려는 연구는 여전히 진척되지 않고 있다. 다행히 현재 문통 가운데 물명고 연구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5개년 국책 프로젝트 일환으로 추진 중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진주류씨 목천공파 문중이 류희와 이사주당 현양사업에 뛰어들었다.

 

현양 사업을 주도하는 인물은 진주류씨 33대손으로 목천공파 5대손이며, 문통을 남긴 류희의 4대손인 류래호 진주류씨 목천공파 종친회장이다. 그는 95세라는 고령의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문중 현양 사업에 열정을 바치고 있다.

 

류래호 회장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11살 어린 나이에 고조할아버지인 류희가 남긴 문통을 고리짝에 짊어지고 경기도 양주 덕소 본가에서 경북 예천 작은아버지 집으로 옮겨다 놓은 인물이다.

 

류래호 회장은 류희와 이사주당의 진면목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대중화 작업과 경기도문화재로 등재시키는 사업까지 완료하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여기고 있다.

 

이번 현양사업은 류희와 관련해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 시도된 학술적 연구를 한 곳에 모으고 이사주당의 가장(家狀)도 다시 완역하는 등 촘촘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아들 류희가 쓴 목천공 류한규의 가장(家狀)을 완역해 류한규 면모가 드러났다. 류한규의 훈육이 단절되지 않았다면 류희의 견문과 학문 세계가 더욱 넓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역산과 율려에 뛰어났던 류한규는 지병인 복하(腹瘕: 뱃속에 딱딱한 덩어리가 생기는 병)가 도져 류희가 11세 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번 문중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류래호 회장은 목천공 류한규와 비슷한 점이 많다.

 

호탕하고 논변이 정확하고 매사 치밀하며 의협심이 강해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등이 그러하다.

 

더구나 젊은 시절에 연극배우를 꿈꿨다거나, 혹은 영화 ‘72호의 죄수’ 제작에 직접 뛰어드는 등 예술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진주류씨 문중에 흐르는 예술적 피가 대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독립운동가인 작은아버지 류근영과 외삼촌 여운형, 인민군에게 총살당한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에 이르기까지 암흑과 혼돈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진주류씨 목천공파 문중의 격동의 시간이 류래호 회장의 95년 기억 속에 마치 현재 상황인 듯 생생하다.

 

다음은 류한규 가장과 문중 관련 류래호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류한규 가장(家狀)에서 파악되는 류희와 류한규의 학문 성향은.

류한규는 경서는 물론 천문, 지리, 수학, 의술 등 능하지 않은 바가 없고 류희의 의술도 부친을 닮았다. 마을에서 류한규를 만나 살아난 자가 대개 천 명을 헤아렸고,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는 성을 류씨(柳氏)로 바꾸기도 했다고 기록돼 있다.

 

▲류희 어린 시절에 아버지 류한규의 학문적 가르침은 어떠했나.

류희가 7살 때 경릉령(敬陵令)이던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나들이객 정후조(鄭厚祚)가 류희를 위해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론해주었다. 다 이해하지는 못하자 류한규가 음양의 소장(消長)과 64괘(卦)와 36궁(宮)과 절기(節氣)와 율려(律呂) 등 여러 그림을 손수 그려서 조리를 정연하게 만들어서 주었다. 류한규는 신축년(1781)에 류희에게 ‘서경(書經)’의 ‘기삼백장(朞三百章)’을 가르쳐주었고 이로 인해 ‘기주주설(朞註籌說)’ 1권을 지었다.

 

▲문통 중 일부 덕소에 남아있던 것은 후에 어찌 됐나.

6.25 중 서울 수복 시 덕소 집에 들렀더니 옆집에서 가져가 도배지로 썼다. 풀을 칠해 착 달라 붙어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작은아버지가 중요한 것은 예천으로 거의 다 옮겼다.

 

▲류근영 작은아버지가 문통을 예천으로 가져가서 어찌했나.

문통 책을 예천 향교에서 유림들과 같이 해석했다.

 

▲류근영 작은 아버지의 독립운동은 어떠했나.

감옥까지 갔다 와서 왜경의 감시를 피해 예천으로 낙향했다. 대창학원 등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가르쳤다. 우리 아버지 류운영도 1919년 3.1 만세 때 서울 수표교 다리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나눠줬다. 작은아버지는 거기서 잡혔고 아버지는 도망갔다. 어렸을 때 들었다.

 

▲회장님의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

우리 아버지도 학문이 빠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근영 작은아버지와 함께 류성무 증조할아버지한테 배웠다. 조부인 류정린은 증조할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류성무는 류희의 아들로서 류희로부터 직접 배웠고 학문이 뛰어났다. 작은 아버지는 신학문을 가르치려고 경성고보에 보냈다.

 

▲회장님은 어떻게 용인 모현을 떠나 서울에서 태어났는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다 돌아가시고 난 뒤 우리 아버지가 서울 외갓집으로 올라갔다.

 

▲아버지는 왜 서울로 올라가셨나.

아버지 처남이 여운형이다.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 여운형씨의 누이동생인 여운현이다. 모현에서 농사만 지어먹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여운형이 한독당 일 보게 하려고 매부를 불러올렸다. 서울에 가면 여운형, 이시영 부통령, 초대 감찰위원장 하던 정인보씨 등이 한독당이다. 그 당시에 정당이 있었다. 아버지와 여운형은 처남매부지간이지만 잘 통했다. 사업 같은 것도 함께 의논했다.

 

여운형은 그 당시에 일본 정부에서 대만총독을 준다는데 안받았다. 그전에는 철도가 국철이 있고 사철이 있는데 지금 서울서 춘천 가는 것도 옛날에 사철이다. 개성과 토성 사이에 사철을 여운형에게 특권을 주는데 싫다고 안받았다. 지금 정당에서 특권 주는 식으로 일본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일본이 여운형을 자꾸 포섭을 하려는데 안넘어갔다. 나중에 반 빨갱이모양으로 이승만 대통령한테 암살 당했다. 여운형씨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호상을 봤다. 호상은 총괄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덕소에 있을 때 내가 어렸지만 여운형씨가 우리집에 자주 왔다 갔다.

 

▲회장님 학창시절에 의협심이 강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경성농업학교에 일본 애들이 70%고 한국 애들이 30%다. 조선 애들 건방지다며 무시하고, 상급생들이 때렸다. 학교 안에서는 일본 애들한테 달려들지 못한다. 걔네는 덩어리가 많기 때문이다. 퇴교할 때 길목에서 기다리다 잡아가지고 반쯤 죽여 놓았다. 일본 애들이 학교에 고발하면 정학을 당해 학교를 며칠 쉬었다. 벌도 서고 빠따도 맞고 그랬다. 심한 거는 목검으로 엉덩이 때리는 거고 보통은 신고 있던 슬리퍼로 따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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