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의 편지 황명걸 혹여 살아계시다면 배곯으시고 돌아가셨대도 넋마저 편치 않으실 납북되어간 두 분 삼촌 짐 챙기러 삼팔선 넘으셨다가 발묶인 할머니께서야 워낙 강파른 옛분이니 그쯤은 예사로이 견뎌냈을 일이지만 그곳에 남은 외삼촌, 외할머니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고 오십년이 넘게 지난 오늘에 조금도 빛바래지 않은 고향 풍경은 내가 가진 단 하나의 보석 평양 친가 유동 기생만치나 미색인 수양버들 아래 매생이가 떠있는 대동강가여 외가인 탄광촌 사동은 강돌마저 검어 맑은 물빛이 더욱 푸르렀다오 아버지의 어머니이신 나의 할머니! 고향 갈 날이 너무 막연해 제이의 고향으로 삼은 무너미 북한강 건너 마석땅에 당신의 아들 며느리 눕혔습니다 망향하시라고 남으로 머리를 두고 북을 향하게 해 머잖아 이 손자도 부모를 따라 논산 오강리 여자 손자며느리와 함께 그 아래 육신을 뉘이겠습니다 황명걸 시인은 193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62년『자유문학』지를 통해서 문단에 나왔다. 동아일보 재직 중에 자유언론운동을 펼치다 해직되었다, 그후 그는 양평의 두물머리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자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왔다. 이 시는 그의 망향가여서 울컥한다. 실향의 눈물 가족이 얼마인데
나는 자연을 표절했네 정 희 성 어떤 이는 말하네 시인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고 듣는 사람이라고 나는 새의 목소리를 빌려 나무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받아쓰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손녀가 창밖을 내다보며 저 혼자 하는 말도 받아 적네 아 자연은 신비한 것 세상 그 누구도 한 적 없는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네 어느 시인은 말했지 나는 자연을 표절했노라고 정희성은 서정시인은 아니다. 그의 시는 세상의 모든 삶을 아우른다. 그런 그가 자연을 표절했다고 한다면 수긍하기 어렵다. 자연을 표절했다는 말은 좁게 말하면 서경을 노래한 시를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원자에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자연 현상 아닌 것이 없으니 시인이 자연을 표절했다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보고 듣는 사람이라는 말도 맞는 말이다. 새의 목소리를 빌려 나무의 노래를 듣는다면 진정한 시인이다. 나무의 목질 속에 숨겨진 거문고나 가야금을 보았을 터이고 현의 울림을 들었을 터이다. 어린 손자의 혼잣말은 시고 노래다. 그것을 받아 적는 시인의 눈빛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
앗숨* 정끝별 허공에 거미줄을 치는 거미처럼 종일 제 거미줄에 걸려 있는 거미처럼 모른 듯 모든 걸 걸고 내민 엄마 손을 잡는 아가손처럼 엄마 손을 놓고 달려가는 아가손처럼 모른 듯 모든 걸 놓고 벼락에 몸을 내준 밤나무가 바람에 삭아내리듯 절로 터진 밤송이가 제 난 뿌리로 낙하하듯 남은 숨을 군불 삼아 피워올리겠습니다 매일 아침 첫 숨을 앗 숨으로! * 앗숨(Ad Sum) :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정끝별 시인은 독특한 상상력과 언어의 파괴적 운용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러나 「앗숨」은 그의 이와 같은 시세계에서 비껴있다. 시적 화자가 있는 곳은 허공에 쳐 있는 거미줄이다. 거미는 그러므로 화자의 은유다. 종일 거미줄을 치고나서 그 거미줄에 걸려 있는 거미의 모습은 세상의 모든 것을 허공에 다 걸고 있는 화자의 모습으로 읽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엄마의 손을 잡은 아가손처럼, 엄마의 잡은 손을 놓고 달려나가는 아가손처럼 모든 걸 놓는다. 모든 걸 거는 행위와 모든 걸 놓는 행위 사이의 간극에 인간이 있다. 인간의 온갖 욕망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의 비의는‘모른 듯’이라는 표현이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것처럼이
그와 나 사이 이태수 벚꽃들이 피고 지는 사이, 나무에서 나무로 새들이 옮아앉는 사이, 스쳐간 바람이 되돌아오는 사이, 그런 사이의 그와 나 사이 어깨 겯고 있는 풀잎과 풀잎들 사이, 그 사이에 글썽이다가 흘러내리는 이슬방울들과 햇살 사이, 그런 사이가 나와 그 사이 꿈속에서도 그 바깥에서도 만나자말자 헤어져야 하는 그런 사이의 그와 나 사이 이태수 시인은 등단 초기부터 서정의 세계를 추구하면서 초월을 꿈꾸어 왔으며 현실을 따뜻하게 껴안아 왔다. 순수한 인간정신의 불멸성을 추구해나가는 시세계를 일관되게 펼쳐온 것이다. 「그와 나 사이」는 이러한 그의 시세계를 잘 보여주는 시편이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사물들은 꽃 피고 지는 벚나무며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 앉는 새들이며 스쳐간 바람이 되돌아오는 소리다. 그뿐 아니라 어깨 겯고 있는 풀잎들이며 풀잎 위에 맺혔다가 흘러내리는 이슬방울이다. 자연은 그에게 수많은 영감을 준다. 그리고 자연 속의 여러 사물들 사이를 흐르는 짧은 순간에 그의 연민은 시작되거나 소멸한다.‘그와 나 사이’는 꽃이 피고 이우는 사이거나 새들이 나뭇가지를 옮겨 앉는 사이거나 바람이 되돌아오는 사이 처럼 한 순간에 눈빛이 오가는 연인 사이인 것이
묵 언 이승하 말을 할 듯 입 열었으나 그대 다만 미소와 손짓만 건네는구나 잘못했다 사랑한다 보고 싶을 거라는 말 대신 그대 미소로 눈물로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달라는 떨리는 손짓으로 이승하 시인은 생명예찬의 시인이다. 그는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생명이 태어나 어미의 젖을 빠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하여 병들고 죽는 과정까지를 노래하는 시인이다. 그러므로 생로병사의 통과의례는 그의 시세계를 이끌어가는 상상력의 근원을 이룬다고 보여진다. 「묵언」은 사랑의 생명성과 그 헤어짐의 안타까움을 노래한 시편이다. 사랑의 시작은 설렘이다. 설렘은 한 영혼이 다른 영혼을 향해 문을 두드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문이 열리면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는 사랑도 생로병사라는 통과의례를 거친다는 가정 아래, 사랑의 종언을 말하는 장면이다. 시제를‘묵언’이라 한 것으로 보아 할 말을 참고, 몸짓으로 말을 대신하는, 아니 몸짓으로 말보다 더 아프게 말하는‘그대’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읽힌다. 헤어지며‘그대는 다만 미소와 손짓만 건네는’데 이때의 미소는 울음을 머금은 미소인 것을 화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잘못했다/사랑한다/보고 싶을 거라는 말 대신’미소로,
내 안의 저녁 풍경 노향림 배밭 너머 멀리 저녁 구름이 걸렸다 필라멘트 불빛처럼 역광이 구름 틈새로 새나오고 당신은 아직도 바다를 행해 앉아 있다 등 돌려 텅 빈 독처럼 앉아 있는 당신에게 시간은 저녁을 가득하게 퍼 담고 있어 하얗게 지는 배꽃들이 당신의 발등과 무릎 어깨 머리 위로 마구 떨어진다 바다 위에서는 새들이 한쪽 발을 들고 머리를 주억거린다 그들이 이따금 모래톱을 물고 나는 사이 떠돌던 당신 마음은 어떤 빛일까 밤은 저만치 젖은 날개 터는 소리로 파도 위로 걸어오고 그렇게 당신은 오래도록 생각에 묻힌다 노향림의 저녁 풍경은 당신과 바다와 배꽃 지는 일몰의 쓸쓸하고 아득한 풍경이다. 당신은 등 돌려 텅 빈 독처럼 아직도 바다를 행해 앉아 있다.‘아직도’라는 표현으로 보아 당신은 아까부터 아니면, 더 오래 전부터 바다를 향해 미동도 없이 앉아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모습이 그녀의 마음의 풍경이라는데 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그녀를 등 뒤에 두고 먼 바다를 보고 있는 당신이 있고, 정처없이 떠돌던 당신 마음은 어떤 빛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바다를 행해 앉아 있는 당신의 발등과 무릎과 어깨와 머리 위로 마구 떨어지는 배꽃, 그
그리움, 그 뻔한 것에 대해 차주일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서면 뒤돌아보는 시야만큼 공간이 생겨난다. 부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만큼 팽창하는 영토. 자신을 발견 할 수 있는 유배지. 외곽을 허물어놓고도 자신만 탈출하지 못하는 누구도 입장 할 수 없는 성역에 과거로 얼굴을 펼치고 미래로 표정을 그리는 사람은 쉬이 눈에 띄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내 마지막 표정이 생각나지 않아 내 얼굴에 무표정이 머문다 무표정이 진심이라는 풍문이 떠돈다. 차주일의 시 속에 출현하는 무표정은 수많은 표정을 숨기고 있는 무표정이다. 그리움과 미련을, 사랑과 파탄을, 삶과 질곡을, 절망과 나락을, 분노와 결기를 안으로 잠근 묵묵한 표정이 그의‘무표정’인 바, 그러므로 무표정이 진심이라고 노래 한다. 무표정은 이 시편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비의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는 마음의 소리다.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거나 그리운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일 것이다. 그리움의 공간은 그리움으로 더욱 팽창하는 영토이거나 그리움으로 가는 유배지여서 탈출 하지 못한다. 그리움은 시간이 이루는 표정이어서 과거의 얼굴이거나 미래의 얼굴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시적 화자의 표정이 생각나지 않아 무표
몽유운무화 이원규 몸이 무너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너무 쉬운 여자는 지루하고 너무 뻔뻔한 남자는 지겨워서 저잣거리는 침침하고 산중 헤매는 것도 심심해서 7년 동안 모터사이클 타고 별종 위기 야생화를 찾아다녔다 바위 뒤에 숨은 아이 산그늘 깊이 무너진 남자 아예 얼굴을 지워버린 여자 안개 치마를 입고 구름 이불 덮어쓴 몽유운무화夢遊雲霧畵 저 홀로 훌쩍이는 꽃을 찾아 지구에서 달까지 38만 4300킬로미터 오지의 야생화들이 병든 나의 폐를 살렸다 이원규는 지리산 시인이다. 어느 날 기자로 일하던 서울살이를 훌쩍 떠나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21년째 살고 있다. 1990년 청사민중시선으로 출간된 시집 『빨치산 편지』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그럴줄 알았다 했을 것이다. 그는 이번에 시사진집 『그대 불명의 눈꺼풀이여』와 시집 『달빛을 깨물다』를 동시에 출간했다. 지리산의 밤과 달과 별과 야생화와 바람과 숲과 계곡을 모터사이클의 굉음과 마음의 렌즈로 담아낸 서정적인 시편들이다. 시집을 받고 인사동, 출판기념회에 가겠다 약속하고 지키지 못한 것을 이 지면으로 대신한다. 몸이 무너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야생화였다. 일상이 지루하고 지겹고 심심해서 모터사이클을 타고 지리산을
론리 푸드 임지은 식초에 절인 고추 한 입 크기로 뱉어낸 사과 그림자를 매단 나뭇가지 외투에 묻은 사소함 고개를 돌리면 한낮의 외로움이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는 이미 배가 부르니까 천천히 먹기로 한다 밤이 되면 내가 먹은 것들이 쏟아져 이상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식초 안에 벗어놓은 얼굴 입가에 묻은 흰 날개 자국 부스러기로 돌아다니는 무구함과 소보로 .......(중략)..... 나는 식탁에 앉아 혼자라는 습관을 겪는다 의자를 옮기며 제자리를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가끔 미래에 있다 놀라지 않기 위해 할 말을 꼭꼭 씹어 먹기로 한다 『무구함과 소보로』는 임지은의 첫 시집이다. 그녀는 이 시집에서 명사형의 시어들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무구함’은‘무구하다’라는 형용사의 명사형이다. 명사형‘무구함’이‘소보로’와 병치되면서‘무구함’은 사물처럼 울림을 갖는다. 임지은 시의 이 비의를 알기까지 적지 않은 시편을 읽어내야 할 것이다.「론리 푸드」는‘혼밥’으로 의역하면 좋을 듯 하다. 한낮의 외로움은 밝은 연두빛으로 오지만 밤의 외로움은 어두운 회색빛으로 온다. 외로움의 색깔이 달라지는 낮과 밤이다. 식탁에 부스러기로 돌아다니는‘무구함과 소보로’
목덜미 박미란 그 사람을 버리고 그 사람에게로 가는 동안 창문으로 비둘기가 날아왔다 찬란하다 날짐승들이여 흔들리는 새벽의 음악이여 모든 색이 저 목덜미에서 나왔을까 파랑인가 하면 피투성이 붉음, 붉음인가 하면 비명을 삼킨 검정의 기미 죽어서까지 기막히게 달라붙던 날짐승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목덜미가 움직일 때마다 달라붙던 날짐승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목덜미가 움직일 때마다 색은 바뀌었고 잔디밭에 뿌려져 초록을 얻었지만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박미란에게 시시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그녀는 시를 쓰는 모든 고민들, 몸짓들, 뒤척임들을 ‘참 시시하기도 하지’라고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시시하지 않은 것이 있다. 죽음이다. 「목덜미」는 죽음을 노래한 시다. 그녀의 레퀘엠은 엄숙하고 경건하다. ‘그 사람을 버리고 그 사람에게 가는 동안’은 A를 버리고 B에게로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버린 사람과 찾아가는 사람이 동일인이다. 그녀는 버린 사람-죽은 자를 찾아가는 중이다. 마음의 창으로 날아든 비둘기는 죽은 자의 영혼일 것이다. 그러므로 ‘찬란하다 날짐승이여/흔들리는 새벽 음악이여’라고 노래 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아름답고 애절했으면 찬란한
놀이터 류인서 여기서 만났을 거다 우리 미끄럼틀과 시소, 혼자 흔들리는 그네, 생울타리에 기댄 작은 청소 수레가 속한 모래의 세계 이쪽 기울 때 너는 떠올랐니 우리는 평균대가 아니어서 균형점을 앞에 두고 나뉘어 앉는 세계 시소는 약속이 아니어서 잽싸게 무게를 버리며 달아날 수 있다 떠 있는 빈 자리와 쏟아지는 이의 우수꽝스러운 엉덩방아, 이것은 갑에게서 가볍게 을이 생략되는 저울 놀이 데워진 모래는 한 결 기분이 좋다 굴을 파고 두더쥐 놀이를 하면 구근 대신 손을 묻어 둘 수 있다 꽃과 쓰레기 장난감 블록들 싹 트는 경작지 원통의 미끄럼 터널 속으로 청소부처럼 사라지는, 나쁜 공기처럼 빨려나오는 아이들 굴뚝을 지나는 그을음 묻은 해 바짓단에 떨어지는 해변 공초와 휘파람, 아무래도 이곳은 빌딩 창문에서 더 잘 보이는 어른들의 세계 토르소로 떠다니는 구름 우주복 잠깐 나타났다 지워지는 그림자들의 숨소리들 류인서는 분열된 자아의 파편화된 시간을 찾는 여정을 계속한다.「놀이터」는 유년의 시공과 오늘의 어른들의 시공이 교차하는 모호한 공간과 시간을 드러낸 작품이다. 너와 나, 개인과 공동체, 승자와 패자의 삶의 방식을 압축해서 보여주면서 서로 화해하지 않는 현장을 슬
장마 - 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박준 그곳의 아이들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중략).......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 했습니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적었습니다 박준 시인의 시편들에서 드물게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태백은 한물 간 탄광촌이어서 이이들은 그악스럽게 울고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다. 절망적인 삶의 터전이다. 모든 길은 검어 빛조차 검은 빛이다. 처음 쓴 답장에는 갱도에서 수맥으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구겨버리고 고쳐 쓴 편지의 처음 문장이‘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글이다. 돌아갈 때쯤은 우기여서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을 거라는 문장 속에는 가정법이기는 하지만 그리운 사람에 대한 고백이 숨어 있다. 그렇기는 해도 이 시는 태백이라는 폐광촌의 팍팍한 삶을 보여주는 삽화다.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