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인류 어떤 책을 읽어본다 한들 첫장을 넘기자마자 배울 학으로 강제되도록 시작되는 글은 논어가 유일이다. 배울 학學이란 상형자로 풀어쓰면 어린아이가(子) 책상에서(冖) 양손으로(臼) 계산?(爻) 혹은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흔히 한‧중‧일 옥편과 사전 글자를 통털어 17만자라 하는데 이 모든 글자의 앎의 시작은 배울학에서 비롯된다 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올바른 행동은 배우는 행동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배워야 한다. 어려서는 감문청학敢問請學이라하여 어른에게 감히 묻기를 청하여야하며, 늙어서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하여 아랫 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goT다. 일찍이 공자의 가장 아둔한 제자로 일컫는 증자는 자신의 배움의 삶을 이렇게 고백한 바 있는데 논어 학이편 1-4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나 자신을 살핀다. 남을 위하는 일에 충성하지 않았는가 벗과 사귐에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는가. 배운 것을 복습하지 않았는가. 모든 결과에는 과정이라는 배움이 담겨져 있다. 그 중심에는 이재명이라는 경기도지사도 포함된다. 모든 국민들이 알고 있는 사실중 하나가 민선시대 이후 역대 경기도지
[용인신문] 도마가 묻는다.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에 예수는 천고에 길이 남을 답변을 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도마의 우문에 대한 예수의 현답인데 정작 도마는 깨닫지 못한다. 예수 부활 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결과는 그악스러웠고, 도마는 의심의 아이콘으로 낙인 찍힌다. 당시의 도마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이지만 그는 생전의 예수를 따르면서 예수의 모든 말씀을 들었고, 예수의 모든 기적을 보았다. 그런 그였지만 단 하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 있었는데 죽은자가 살아난다는 부활의 신앙이 없었다. 그의 의심의 정도를 사도요한은 그의 고백을 토씨하나 안빼고 그대로 기록한다. 내가 내 눈으로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3년을 동고동락한 스승을 향해서 세상에 이보다 더 지독한 불신이 충만 탱천한 말이 또 있을까(요한복음20:25). 그런 일이 있은지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도마와 함께 집 안에 있을 때 문이 닫혔는데 부활한 예수가 나타난 사건이 있다.
[용인신문] 논어 헌문편 14-36장에 혹자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되물음이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원한을 은덕으로 갚는다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는 주저함 없이 “그렇다면 덕은 무엇으로 갚으란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쉽게 말해서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 이미 덕으로 그 원한을 갚았는데, 문제는 남이 나에게 덕을 베풀었다면 그 베푼 덕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갚겠는가?”라는 말씀이다. 이 말의 출전격인 문장이 노자 도덕경 63장 은시恩始편에 보이는데 덕으로 원수를 갚으라는 말이다. 아마도 공자는 혹자의 물음에 노자의 이 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암튼 공자의 답은 노자의 말에서 확실하게 진일보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답은 이렇다. “원한은 올바름 곧 정직함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으라”이다. 벼슬을 갚아야 할 빚으로 본 것이다. 곧 은혜를 갚아야 하는 벼슬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벼슬의 높이가 어떤 위치까지 이르렀다면 그것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성의 기운, 곧 은혜라는 것이다. 바로 이 은혜를 그 자리에 올라선 자는 갚아야 마땅하다는 것. 서경 우서 요전1-3장에 이런 문장이 있다. “백성들을 잘 다스
[용인신문] 정치가 그 나라 백성들과 대화하지 못한다면 둘 중 하나다. 자연사던가 고독사던가 이다. 정치란 백성들의 부음에 대한 응답이다. 정치인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처한 삶의 처소에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는 것이다. 그랬을 때만이 정치하는 사람에게 정치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정치는 도깨비방망이는 아니다. 그런데도 그 이상가는 ‘묘수가 나와야 한다’라는 것이 정치인의 숙명인 것이다. 정치는 백성들에게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줄 때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 백성들보다 너무 앞서가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뒤처져서는 더욱 안 된다. 정치인은 백성이 갖는 도덕이나 윤리의 잣대보다 더한 바름이 있어야 하고 정치란 누군가를 위함 이 아니라 누구나를 위함이어야 한다. 북송 학자 육상산의 말처럼 사람살이의 질서는 정치에서 나온다. 자로가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한다. 먼저 수고하는 것이다. 그러자 자로의 지능으로서는 다소 어려운 답인지라 이해가 안 된 자로는 다시 묻는다. 한 말씀 더 해주시지요. 그러자 공자는 말한다. 그렇게 하는데 게을리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먼저 수고하는 것에 게으르지 말라는 말이다. 자로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용인신문] 지식인이 시세에 응하여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벼슬이 지식을 먹었다”라고 말한다. 문중자 왕통의 말이다. 그래서 지식인이 벼슬에 나갈 때는 물을 가득 채운 그릇을 들고 가게 한다. 가득 채운 그릇의 물은 여간하지 않고서는 흘리지 않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있어서 삼가고 조심하라는 계이다. ‘환공자계’라는 말이 있다. ‘환공이 스스로 경계 삼았다’는 말인데 ‘환공측기’라고도 한다. 노나라 환공은 정사를 보는 자리 오른편에 기울어진 그릇을 두었다. 이 그릇은 비면 기울고 반쯤 차면 바르고 가득 차면 엎어진다는 ‘계영배’다. 이를 순자는 유좌편에서 공자의 입을 빌려 말하길 “가득 차고도 기울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흔히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의 전거가 되는 말이다. 세상살이라는 것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사람 살이는 돌고 돌아 그 무엇하나 ‘이것이 정답이다’라는 게 없다. 주자는 이것을 한 글자로 정리한다. ‘곧을 직直’, “세상 똑바로 살아라”쯤 된다. 주자가 임종 시에 제자들을 불러 했다는 마지막 말이기도 하다. 세상 똑바로 사는 거 그거 어려운 것도 그렇다고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남의 눈에 눈물 내지 않고 남
[용인신문] 논어에 공자의 노장사상을 볼 수 있는 대목이 몇 군데 있다는데 그중 하나가 논어 태백편에 나온다. “흔들리는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며, 어지러운 나라에는 아예 살지를 말며, 정치 질서가 바르게 서면 함께 정치하며, 정치 질서가 깨졌다면 숨어라.” 자신의 몸을 보신하기 위해 은둔하는 것을 꽤 싫어했다는 공자의 말치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현자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고, 그 다음가는 사람은 어지러운 땅을 피하며, 그 다음가는 사람은 임금의 낯빛을 보고 피하며, 그 다음가는 사람은 임금의 말을 듣고 피한다.” 이 또한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로 저마다 나만이 유일무이한 적임자라며, 대권 등판가도에서 목에 핏대를 올리는 중이다. 어떤 이는 예절의 고향 안동 예안에서 출사표를 던지는가하면 혹자는 자신을 임명해준 문재인 대통령을 끌어내어 절딴내겠다며 청요직에 있던 자들이 줄사표와 더불어 출사표를 던졌다. 저들의 면면이 눈에 띄는 대목이 있는데 대부분 율사 출신이라는 점이다. 검사라느니 변호사라느니 판사라느니 말 만들어도 으리으리한데 문제는 율사라는 것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캐고 들먹이는, 그 이상도
[용인신문] 초나라 사신 괴철蒯徹이 말한다. 항우와 유방의 양자대결 속에 누구도 한신 대장군의 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때에 한신 대장군께서는 지금 나라를 창업하시어 중원을 유방의 나라, 항우의 나라, 그리고 한신의 나라, 곧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내놓는다. “만약에 지금 나라를 세우지 않는다면 한신 대장군께서는 누가 통일하든 천하통일 뒤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괴철이 돌아가자 한왕의 사신으로 와있던 유방의 참모 육가陸賈가 나서서 말한다. “한신 대장군께서는 바닥부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일입니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하늘의 뜻이 맞았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한신 대장군께는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만족하시고 괴철의 말을 듣지말고 유방과 인신의 절개를 져버리지 마소서. 유방이 승리하면 전쟁도 끝날 것이고 한신대장군께서 할 일이라곤 평생 호위호식만 남았는데 뭘 더 바라시렵니까?” 이때 한신은 고민한다. 천하의 주인이 되느냐, 이쯤에서 만족하고 사느냐. 여기서 한신은 안분지족의 삶을 택한다. 그 결과는 목이 잘리고 사지가 찢겨 죽는다.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생을 종친 사내.
[용인신문] 유학자 집안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 경서 공부보다 앞서는 것이 성품 교육이다. 글공부가 사람의 도리를 앞서면 위험하다는 것이 당시 부모들의 생각이다. 자식을 기르면서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지 않으면 그것은 부모의 잘못이고, 스승의 가르침이 약하여 사람의 도리를 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승의 잘못이다. 부모와 스승이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음에도 사람의 도리가 몸에 익혀지지 않았다면 이때는 초달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잘못 가르치면 그 욕은 마땅히 아비에게로 향한다. 대통령의 아들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정부지원금을 수령한 사실로 갑론을박이 분분하다. 그는 해당 기관이 정한 규정에 맞게 신청서를 제출했고, 다수 심사위원들의 심사 결과에 따라 소정의 정부지원금을 수령했을 것이다. 그가 지원금 수령 과정에서 위법이라든가 내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아빠 찬스라든가, 그에 상응하는 어떤 뒷배도 활용했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롯이 제힘만으로 투명하고 정당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모든 절차를 진행했을 것이다. 다만 아버지가 그 시점에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다는 억울한 굴레가 덧씌워졌을 수도 있다. 후한서 원소열전 주석에 원소는 어려서부터 외모가
[용인신문] 맹자가 경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오로지 송나라 학자 주자의 공이다. 천하통일국 진나라 시 황제 때 분서갱유라는 악명으로 다양한 종류의 유가서들이 불태워 지지만 맹자는 열외 된다. 말 한마디면 백성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던 절대군주 시대에 맹자의 가르침은 위험하기 짝이 없던 탓에 유가에서 그리 드러나지 않았던 책에 불과해서다. 맹자의 가르침은 대략 세 개로 압축된다. 첫째, 백성은 임금보다 우선한다는 역선逆先. 둘째, 백성의 비위에 안맞으면 임금이라도 그 자리에서 끌어 내려야 한다는 역위逆位. 셋째, 도덕적으로 흠이 보이면 언제라도 임금의 목을 쳐서 성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역성逆姓. 맹자는 통치자에게 있어서는 결코 백성들이 봐서는 안될 불온의 서다. 군주가 백성을 막 대하면 백성은 임금을 원수처럼 여겨도 된다는 것이 맹자가 가르쳐주는 맹자 독법이다. 그러므로 “맹자를 읽고 군주의 일거수일투족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맹자를 잘못 읽은 것”이 라는 말이 회자 될 정도였다니 맹자 책은 군주에게 두려운 책임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맹자책 7권 전체가 다 그렇게 사나운 것만은 아니다. 하루는 맹자가 제자 악정자가 노나라 재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
[용인신문] 글씨가 사람을 평가하던 시대가 있었다. 글씨는 바른 글이라 하여 ‘해서’를 으뜸으로 친다. 선비로서 서예가가 아닌 오로지 문장의 글씨체. 해서체로 일가를 이룬 인물을 꼽는다면 미수 허목이 지존이다. 노년의 우암이 몸에 고질병이 들어 노복을 보내어 정적 미수에게 처방전을 부탁했다. 미수는 어디를 가던 길이라 노상에서 선채로 걸으면서 노복에게 우암의 병증을 듣는대로 처방전을 써준다. 왼손바닥에 갱지更紙를 놓고, 오른손으로 붓끝을 잡고 팔꿈치가 닿지 않은 상태에서 걸으면서 약방문을 써서 건네주었다. 노복으로부터 약방문을 받아든 우암은 갱지 글씨가 워낙 빼어난지라 미수가 집 서안에 앉아 쓴 줄 알고 안부를 물으니, 노복으로부터 약방문 쓴 경위의 전후 사정을 듣게 된 우암은 원본은 자신의 옷 소매 속에 넣어두고 필사본을 써서 노복에게 주어 약을 지어오게 했다 전한다. 글씨가 그만큼 빼어났다는 말이다. 걸으면서 바른 글씨 써내기란 여간한 것인데 미수가 그것을 해낸 것이다. 이른바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걸으면서 쓰되 점이든 삐침이든 파임이든 단 한 획이라도 흔들림이 없는 그런 글씨. 그런 글씨를 우암은 생전에 본 것이다. 우암은 어려서 10년이
[용인신문] 청나라 말기 어느 고위 공직자는 논어 한 구절을 먹으로 지운 채 읽었다 하는데 다름 아닌 논어 안연편12-18문장이다. 하루는 노나라 정치 실세 계강자가 공자에게 답을 구한다. “도적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나대는 통에 국가를 운영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가 요지다. 계강자는 첩의 아들로 본처의 자식을 죽이고 권좌에 오른 악질로 전횡專橫과 주구誅求로써 군주보다 훨씬 많은 부를 쌓은 인물이다. 이를 모르지 않는 공자는 앞뒤 볼 것도 없이 일언지하에 그것도 아주 그악스럽게 말한다. “네가 욕심부리지 않으면 설령 상을 준다고 해도 백성들은 훔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에 대한 해석이 논어 옹야편 6-16문장에 나오는데 질이 문보다 승하면 거칠면서 저속하게 되고, 문이 질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그러므로 문과 질을 조화롭게 한 연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깜냥도 아닌 것이 글깨나 배웠다고 벼슬만 높아 가지고 깜냥이나 되는 냥, 세상 그렇게 함부로 사는 거 아니라는 공자가 계강자에게 주는 독설에 가까운 경책이다. 이 말에 대한 사마천식 해석은 이렇다. 사마천 사기 상군열전의 기록이다. 법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위에 있는 것들이
[용인신문] 정치란 모든 국민을 편안하고 잘살게 해주는 것, 그게 정치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악마보다 무섭다는 교회 장로가 정치를 하고, 강철 군화를 신은 군인이 정치를 하고 투사가 정치를 했다. 이제는 얼굴이 알려졌다 싶으면 정치판으로 뛰어든다. 그 속에는 부지기수가 이런저런 일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자들로 가득하다. 예기 책에 이르길 천하 모두는 백성의 것이니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가려서 정치를 맡겨야 백성의 삶이 고되지 않다고 했다. 노나라 정공 14년 56세가 된 공자는 대사구가 되어 법 집행관으로 임한지 3개월이 되자 그의 온용덕화정책이 향리 구석에까지 미쳐 물건을 사고팔 때 속이는 법이 없으며, 남녀 간에 음란한 일이 사라졌으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아 여행자가 노나라에 오면 관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잃은 물건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공자세가편에 나오는 말이다. 도불습유道不拾遺라는 말이 있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백성이 사는 게 풍족해져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형벌이 엄하면 남의 물건에 손댈 엄두를 못낸다는 의미도 있다. 이는 패도시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