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서 고교 교사 재직하며 친정 어머니 장맛 고스란히 이어받아 장독대에 보물같은 묵은장 항아리… 남녀노소 체험의 장으로 진화 [용인신문] 이문자 선생은 연안이씨 저헌 이석형 선생의 18대 후손으로 처인구 모현면 능원 3리에서 400년 이어 내려오는 연안이씨 종갓집의 전통장 비법을 전수하고 있는 전수자다. 그녀는 이씨 집안의 며느리가 아니라 집안의 딸로서 조상 대대로 이어내려오는 장맛을 전승하면서 전통 발효 음식 체험 교육장인 '다인네 외갓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가 현재 교육하고 있는 곳은 친정 아버지가 물려준 아버지 농장터다. 마당에 장 항아리가 즐비하다. 유독 아버지를 따랐던 그녀는 퇴직 후 돌아오려던 고향땅에 미리 돌아왔다. 친정 아버지가 작고하자 혼자 남게 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당시 분당에서 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하고 있던 그녀는 출퇴근을 하면서 친정 어머니의 곁에 머물며 어머니 장맛을 고스란히 맛보고 기억했다. 친정 어머니는 종갓집 맏며느리가 아니었다. 큰댁 맏며느리가 일찍 돌아가셨고 다시 들어온 맏며느리는 신식 어머니셨기에 이를 대신해 이문자 선생의 어머니가 종갓집 맏며느리 역할을 하면서 장맛을 지켰다. 그런 어머니가 2000년에 작고
2002년 태성중고 역사교사로 재직하며 독립운동역사 남다른 관심 신흥무관학교 교장 여준 선생 연구·이영선 지사 일기 등 발굴 감회 [용인신문] 김태근 용인학연구소장은 용인의 3세대 지역학 연구자다. 굳이 그는 향토사학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보다 폭넓은 시선으로 지역 역사를 객관화 시켜 들여다보고자 하는 의미에서 자신을 용인 지역사 연구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1세대의 뒤를 이어 3세대가 바통을 이어받아 지역학의 맥을 잇고 잇는 오늘날, 용인학연구소장에게 주어진 역할은 보다 체계화 되고 전문화 된 연구와 정리라고 할 수 있다. 중앙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 김 소장은 특히 한국 근대사에 관심을 두다보니 용인 지역의 독립운동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 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지역에서 만세운동 행사가 치러지면서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은 박용익 전 용인문화원장이 지역의 미발굴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이인영 전 용인문화원장 역시 개인적으로 용인의 독립항쟁사를 저술하면서 용인에서 지역 독립운동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2002년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정식 출범하
[용인신문] “나의 작업은 빨래판을 쪼개어 붙이거나 오브제로 활용해 하나의 형태로 형상화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재료에서 벗어나 새로운 매체에 대한 탐구를 통해 표현적 특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죠. 빨래판으로 작업을 시작한지 벌써 30년입니다. 돌아보니 긴 세월이네요. 할 때마다 새로운 시도가 짜릿하기에 앞으로도 이 길을 계속 가고 싶습니다. 이제 저도 환갑을 넘기다보니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 갈수록 수월하지 않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고되고 힘들지만 작업을 하지 않으면 심장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니 내가하는 일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작업을 할 수 있는 창조적 에너지가 있음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빨래판 작가 오성만 선생이 화업 30년을 돌아보는 초대전 ‘조형언어를 탐하다’를 한국미술관에서 10월 30일까지 개최하고 있다. 30년 전에 빨래판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였을 당시 오성만 선생은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가 빨래판으로 작품을 만들어 전시회를 한다고 했을 때 관람객들은 빨래판이라는 재료에 낯설어 했고, 또 한편으로는 흔하디 흔한, 그리고 천덕꾸러기 빨래판이 멋진 미술품으로 변신해 전시장에 걸려 있는 모습에 흥미로와 했다. 30대 청
용인 인물·문화재·민요 등 지역사 탐구 책에 나오는 모든 현장 직접 방문 산교육 80년대 용인문화원 회원 가입 본격활동 향토 씨족사회 조사 새로운 도전 신바람 [용인신문] 이종구(71) 전 용인학연구소장은 용인의 도요지 조사를 비롯해 용인의 근현대 인물연구, 용인의 성씨 연구, 고문헌 발굴 등 다방면에 걸쳐 연구 실적을 남기면서 용인향토사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어느덧 칠순을 넘겼지만 용인 향토사에 대한 끝없는 사랑만큼은 청년의 열정에 뒤지지 않는다. 용인 곳곳을 누비는 그에게서 행복감이 느껴진다. 이 전 소장은 중고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향토사에 뛰어들었다. 용인상고, 수지중학교, 성지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이 전 소장은 교과 관련 문화재나 역사 인물을 교육할 때 학생들이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지역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향토사를 접목시켰다. “보통 학교에서 속 썩이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 학생들은 학교에서 칭찬받을 일이 없어요. 나는 주로 그런 학생들한테 관심을 갖고서 이모 학생에게는 너는 조선 최고의 천재적 두뇌를 가진 이석형의 후손이다. 멋지지 하면서 반 학생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했어요. 혹은 능원리에 사는
대학 졸업후 1980년부터 땅이름 연구 본격화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문화원 이사직 열정 용인 난개발, 지명과 함께 역사·전설도 사라져 직접 마을 구석구석 누비며 고유 이름 되찾기 [용인신문] 요즘의 행정구역 이름은 참으로 무미건조하다. 그러나 옛 지명은 멋스럽고 기발하다. 우리조상들은 평지에 우뚝하게 서 있는 봉우리(뫼)가 있는 곳이라고 해서 ‘딴미’라고 불렀다. 따로 떨어져 있는 산이라서 불여진 이름이다. 자연스럽고 소박한 게 대부분 이런식이다. 용인의 땅이름 연구에 독보적 존재인 정양화 용인문화원 부원장(66‧전 용인향토문화연구소 소장)은 지금까지 40여년간 땅이름을 조사 연구하고 정리했다. 그의 저서 ‘용인의 땅이름 1, 2’에는 지금은 잊혀진 옛 땅이름부터 땅이름의 유래 등이 잘 기록돼 있다. 옛 지명은 우리말의 보고임은 물론 언어적 묘미, 옛 지명에 얽힌 역사와 전설, 지형에 이르기까지 용인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모든 지명에는 용인의 역사와 조상들의 생활, 조상들이 살았던 흔적이 스며있죠. 용인이라는 이름은 멸오에서 용구를 거쳐 용인이 됐잖아요. 그 속에는 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어지는 용인의 역사가 있는 거에요. 풍속, 종
[용인신문] 용인 향토사의 대부 이인영(78) (사)전승문화연구원 이사장. 그가 있었기에 오늘날 용인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살아있는 용인문화사, 용인학 박사, 용인문화의 거인, 움직이는 용인백과사전 등 그가 청년의 혈기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따라다니던 별칭이 그를 설명해준다. 그의 문화재 발굴 기사가 연일 지방지, 중앙지에 특종을 제공했으며 대서특필 됐다. 용인이 다른 어느 시군에 비교할 수 없는 문화재의 보고임이 그에 의해 속속 밝혀졌다. 그는 선사시대부터 시대별, 장르별로 켜켜이 쌓여있는 용인을 최초로 드러내고 알리기 시작한 인물이다. 비단 향토사뿐만 아니라 그는 한중일 동양 3국의 역사를 비롯해 고고학, 도자사, 미술사, 초상화, 민속학에 이르기까지 전문지식이 다방면에 걸쳐있다. 용인시청 공무원시절 그는 ‘채제공 어제뇌문비’ 현장 설명으로 김용래 전 경기도지사에게 발탁돼 야전침대를 놓고 밤을 새워가며 경기도향토사료관을 개관시켰고, 경기도박물관 기본계획 입안 및 용인 유치를 이끌어낸 것은 물론, 용인시향토사료관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최초 발견해 지정한 보물, 문화재가 45점에 이르며, 저서도 내고장용인(용인지역 전란사-
특별전 ‘예아리에서 정조대왕을 만나다’ 눈길 실감나는 미니어처 왕실 장례문화 한눈에 ‘삼포실버드림’ 운영… 최고의 장례업체 도약 전직 대통령 등 유명인사 마지막 가는길 총괄 [용인신문] “지금 예아리박물관에서는 정조대왕의 국장행렬을 특별전시 하고 있습니다. 미니어처지만 시사하는 게 얼마나 큰지 박물관 자리매김 하는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조대왕은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아들로서 부모에게 효를 다한 인물입니다. 인성을 키우는 데는 효가 근본입니다. 효는 부모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형제, 친구, 이웃간에도 부모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면 그게 다 효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전국에서 유일한 장례 의례 전문박물관인 예아리박물관과 장례업체 ㈜삼포실버드림을 총괄 지휘하고 있는 김보옥 회장은 효를 통해 인본을 회복하고자 시작한 것이 박물관 건립이라며 인류의 영원한 주제임을 강조했다. 예아리는 예로 아름다운 울타리라는 의미로 관혼상제 ‘예’ 속에 들어있는 효와 인성을 회복하는 플랫폼이다. 삼포실버드림도 인성 회복을 목적으로 한 플랫폼 사업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정조대왕 국장행렬 특별 전시 중 현재 용인 백암면 예아리박물관에서는 생전에 지극한 효를
대학서 18년간 한식·떡 강의… 탄탄한 내공 2008년부터 10여년간 원삼면서 ‘웬떡’ 운영 떡과 함께 외길 인생… 몇 천번 실험 레시피 서울 예술의전당 입점… 우아한 떡맛 대중화 [용인신문] “대한민국 1등 떡을 맛보셨나요.” 우리나라 최고의 떡쟁이 이규봉(65) 웬떡 대표. 미쳤다, 무식하다는 말이 좋은 의미일 때는 최고라는 의미로 쓰인다. 떡에 미친 그녀는 무식할 정도로 앞뒤 안 가리고 오로지 떡만을 위해 전투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건강하고 품위 있다는 것을 세포들이 저절로 알아차리는 떡. 혀끝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린애들조차도 은은함에 푹 빠져버리게 만든 떡. 대학에서 한식과 떡 강의 한 것만 해도 18년에, 2008년부터 원삼면에서 웬떡을 운영한 것 만해도 10여년 세월. 40여년 떡 인생을 살면서 최소 몇 천 번의 실험을 통해 태어난 떡이니 당연하다. “나의 온 심혈을 기울이는 거에요. 하루 한번 해야 1년 365번이고, 10년 해야 3650번 아니에요. 두텁설기만 해도 10억 정도 들여서 나온 떡이에요. 그러나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떡은 몇 개 안돼요. 아직도 끊임없이 연구 개발 중이에요.” 고 조리
청동기 유물 실체의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 전통방식 활석 거푸집 사용… 완벽 재현 성공 국내 고고학계 외면 속 일본 등 세계적 관심 [용인신문] 2400년 전 우리나라 고대인들이 만들어낸 불가사의한 비밀의 결정체 다뉴세문경. 국보 제 141호인 다뉴세문경의 오랜 미스터리가 풀린 지 13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오랜 비밀이 풀렸을 때 국내 고고학계의 반응은 냉담했고 그 기류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민족의 우수한 역사와 문화의 실체를 만 천하에 드러낸 대 사건이었건만 다 같이 기뻐해도 모자를 결과에 이견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여전히 학계와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 청동기 유물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장인 이완규 주성장을 만났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7호인 그는 오로지 장인의 입장에서 청동기 시대 장인들의 생각을 읽어내고 청동기시대 장인의 입장에서 청동기 유물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고 있다. 이완규 주성장은 다뉴세문경 거푸집을 전통방식 그대로 활석으로 만들었다. 그의 실증적 재현은 모래와 점토 재질로 거푸집이 이뤄졌다는 기존 학설을 뒤엎고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이완규 주성장은 오히려 고고학계가
하늘거리는 화사함… 소박함과 투박한 맛 [용인신문] 타고난 음색과 카리스마로 무대를 장악하는 용인향토민속 제2호 예능보유자 최근순 명인명창. 용인향토민속2호인 경기향토소리는 용인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창부타령, 풍년가, 사설난봉가 등 민요 30종을 비롯해 용인 백암 상여소리 등 경기토속민요와 산이제소리, 경기12잡가 등이 해당한다. 전통음악을 지키면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올곧게 후대로 전승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는 그녀를 경기도국악당 민요연습실에서 만났다. 현재 그녀는 24년간 몸담고 있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전 경기도립국악단) 악장으로서 후배 연주자들과 함께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최고의 공연을 펼쳐 보이고 있다. 경기향토소리보존회장 이기도 한 그녀는 전수자와 문하생을 대상으로 경기민요의 발성법을 비롯해 시금새 소리 만드는 법을 제대로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57호 경기소리 보유자였던 고 묵계월 선생의 제자로 올해 64세인 그녀는 평생을 노래와 춤으로 살아왔다. 지금까지 국내외 공연이 3000여회에 이를 정도다. 처인구 백암면 장평리 561번지가 고향인 그녀의 할머니는 강신무였고, 아버지는 남사당패와 관련돼 있었다. 세속적으로 전통음악을 접하
15세 때부터 현재까지 전통악기와 함께 한 삶 12줄 가야금 농현의 맛 사라진 25현 안타까움 거문고 등 작품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기증 [용인신문] “지금 나는 일을 하기는 해요. 아쟁만 만들어요. 진짜 아까운 것이 가야금 선생이 없다는 것이에요. 오리지널 선생을 만나면 오리지날 악기를 만나야 하잖아요.” 한 평생을 가야금, 거문고, 아쟁 만드는 일에 신명을 바쳐온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0호 최태순 악기장(현악기). 요즘은 예전같이 가야금 주문이 많지 않아 동백 공방이 썰렁하다. 그의 말대로 12줄 가야금을 가르칠 제대로 된 선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최태순 선생은 15세 때부터 악기를 만들기 시작해서 벌써 65년여의 세월을 악기와 함께 살아왔다. 그런 그가 국악의 쇠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그는 악기를 만드는 장인이지만, 그 누구보다 소리를 잘 들을 줄 안다. “진짜 나같이 귀동냥 많이 한 사람 없으니까. 딱 들어보면 알아. 잘 하는구나. 그러니까 그 사람 선생이 누구냐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그 사람한테 배웠어도 배운 사람이 성음이 않나오면 그건 아냐. 첫째 목적이 성음이야. 그것이 않나오면 끝이야.” 올해로 81세가 된 최태순 선생은 젊은
[용인신문]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대 혼란에 빠져든 오늘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하는 작가가 있다. 이상권. 그는 자연과 동물, 그리고 환경을 이야기 해온 우리나라 최고의 생태작가다. 마침 지난달에 출간된 청소년 소설 ‘신 호모데우스전’에서 이상권 작가는 코로나19를 예견이라도 했듯 동물실험의 잔학성과 인간 중심적 사고를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코로나19 발생 전에 원고를 마쳤던 이 책에는 이미 현재와 똑같은 상황이 묘사돼 있었지만 출판 과정에서 지워냈을 정도다. 신과 인간, 과학과 철학 같은 인문학의 근원을 파고드는 치열한 탐구와 성찰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는 이상권 작가. 그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 속에서 터져 나오는 핵전쟁, 코로나19와 같은 대재앙의 모습의 끝을 이미 예견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상권 작가는 광교산 자락인 수지구 고기동에서도 깊고 깊은 산골짜기에 묻혀 살고 있다. 자연 깊숙이에서 자연을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 사는 측면도 있지만 무참하게 훼손돼 가는 자연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도하기도 한다. 그가 고기동에 자리 잡던 14년 전만 해도 반딧불이가 엄청 많았지만 요즘은 살고 있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