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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저는 엿장수가 아니라 ‘각설이’이랍니다”

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 각설이(방실이) 김현태

 

   

 

전국 웬만한 축제에 가면 단골로 만날 수 있는 각설이.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냥 즐겁고 흥겹다. 그들의 진짜 모습은 어떨까. 가끔은 용인 오일장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중 가장 입힘 좋기로 소문난 여장남자 각설이가 인기다. 빨간 치마에 스타킹, 새빨간 입술 루주와 현란한 분장, 키포인트는 풍만한 가슴(?). 무엇보다 신명나는 노래와 춤, 북춤과 만담까지 다재다능한 용인오일장의 명물. 그런데 지난 해 12월부터 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본 기자가 그를 찾아 나섰다.

 

각설이 인생 “남들 즐겁게 해줘” 자부심 느껴
전국 재래시장 · 축제… 용인재래시장 단골
용인시민으로서 큰 지역축제 없어 아쉬움 커

 

 

   

 

충남 예산출생 각설이 김현태(42). 경주 김씨인 그는 현재 용인시민이다. 용인은 처갓집 동네다. 지난해 말 용인 장터에서 인터뷰를 수락했던지라 전화연락 후 포곡읍 전대리로 그를 찾아갔다. 그런데 약속 장소엔 기자를 알아본 멀쑥한 청년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장터에서 만났던 각설이와는 전혀 딴판이다. 자세히 보니 곱슬머리에 동글동글하니 차라리 귀여운 모습이다.
인터뷰를 위해 인근 찻집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지하다방 이름은 싱글다방. 아직까지도 용인 변두리에 제법 남아있는 배달다방이다. 맥심커피 한잔씩 주문하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어린 시절 온양인지 대전인지에서 각설이 공연을 처음 본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어요. 가슴이 뜨거워졌죠.”
-그럼 각설이는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자동차 정비사로 10여년 살았어요. 그 후 IMF를 전후해서는 책 판매 영업, 치킨 배달, 과일장사, 막노동까지 약 2년간은 안해 본 게 없어요. 그러다가 1999년 경 매헌 윤봉길 문화축제에서 각설이를 만났어요. 그 분을 따라 3군데 쯤 따라다녔고, 그것을 계기로 각설이 인생이 시작됐죠.”
김씨가 각설이 인생을 시작한 것은 어릴 적 가슴에 꽂혔던 감동의 한을 풀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대로 된 스승도 없이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기 시작해 자타가 공인하는 프로 각설이가 된 것이다.
-최근엔 용인 오일장에서 안보이던데. 어떻게 먹고 사는지….
“각설이는 1년 중 겨울 4달이 비수기예요. 지난 해 12월부터 두 달째 휴업중입니다. 꾸준히 공연을 하면 1년 밥벌이는 되죠. 그런데 2000년대 초반 이후부터 하향세예요. 그냥 구루마(손수레)만 끌고 나와서 엿만 파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죠. 관광지에서 자리만 잘 잡으면 할만 하거든요. 요즘엔 천안함, 연평도, 구제역 사태 때문에 각종 지역축제들이 취소되거나 축소되어 밥벌이가 힘들어요.”

 

   

 


-각설이 인생이 얼마나 되었나요.
“경력은 12~13년밖에 안되지만, 저는 엿장수가 아니라 각설입니다. 각설이도 레벨, 급수가 있거든요.”
그의 답변에는 단호한 자존감이 느껴졌다. 현재 우리나라 각설이 협회에 가입된 회원은 600여명. 그 중 김씨는 수차례 방송출연까지 했던 전문 각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래하던 선배와 하던 일을 지금은 혼자서 한다. 웬만한 각설이들은 혼자 공연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김씨는 프로답게 노래, 춤, 북, 만담, 장고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다. 게다가 엿을 팔면서 돈까지 혼자 받아야 하니 분명 만능 탤런트에 틀림없다.
-혼자 하다보면 창피할 때도 있을 텐데.
“솔직히 혼자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처음엔 쑥스러웠지만, 나 때문에 장터의 분위기가 좋아지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볼 때 보람을 느낌니다”
-부인(가족)이 반대하지 않았는지요.
“처음엔 반대했지요. 지방에 같이 갔을 때 처음엔 차에서 나오지도 못했어요. 나중엔 너무 바쁘니까 미안했던지 나와서 도왔지요. 하지만 그때도 고개도 못 들고 엿을 내주고 돈만 받았어요. 그러던 사람이 나중엔 잠깐 같이 일을 하기도 했어요”
벌써 9년째 포곡 전대리 처갓집 동네에서 살고 있는 김씨는 용인으로 이사 오기 전에도 몇 차례 용인오일장에 왔었단다. 김씨는 현재 부인 이은국(43)과의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다. 부인은 전대리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 중이라고 귀뜸한다.
-각설이를 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인가요.
“저는 처음부터 먹고 살기 위해 각설이를 시작한 게 아니예요. 너무 신명을 갖고 일을 하다 보니 손님들이 오히려 엿을 안파냐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가끔은 술 취한 사람들이 반말을 하거나 욕하면 불쾌했고, 이해를 못해 따지기도 하고 싸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가슴으로 이해하고 삭이면서 합니다”
실물과는 전혀 다르게 각설이 분장을 혼자서도 척척해내는 김씨. 그는 일할 때는 술도 마시지 않는다며 자신을 공인이라고 말한다. 전국 어디를 가도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장터의 사람들도 10년 전후의 인연이 되다보니 모두 알고, 가족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시끄럽다고 이해를 못해줘 말다툼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이젠 천안 중앙시장 같은 곳에서는 터줏대감 노릇을 한답니다.(하하)

 

   

-전국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곳은 어디인지.
“서해대교 개통 후 삽교천에서 5~6년간 일을 했고, 벚꽃 철에 화개장터로 일을 갔다가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 풍경에 취해서 집사람까지 불러내려 9개월간 살다왔어요. 안성 바우덕이 축제나 안흥찐빵 축제도 기억에 남아요”
몇 년 전 용인할미성대동굿을 할 때도 2년간 공연을 했다. 용인지역에도 전국적인 축제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김씨. 다른 지역에 비해 용인지역 행사가 적어 아쉽다고 말한다. 이왕이면 내가 살고 있는 용인에서 공연을 많이 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램이다.
-각설이를 하면서 얼마나 버는지 솔직히 말해줄 수 있나요. 그리고 가장 많이 벌 땐 얼마나 되나요.
“최고로 많이 벌었던 게 화개장터였어요. 하루 150만원정도. 하지만 이젠 갈수록 줄어서 하루 20~30만원 벌입니다. 그나마 비수기를 제외하고 꾸준히 공연까지 겸하면 연봉 3000~4000만원 정도 될 거예요”
얼핏 들어보면 짭짤한 수입 같지만 엿과 장비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다니다가 무릎 관절까지 병이 났단다. 이 또한 직업병이다. 그래서 얼마 전엔 전동차를 맞췄다. 무거운 장비가 실린 손수레를 끌고 매일 3~4km씩 돌아다니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설이 후배 양성 계획은 없는지요.
“처음엔 이 일을 배워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즘엔 별로 없어요. 잘못하면 내 자리까지 없어져요. (하하)”
40대 초반인 김씨는 각설이 업계에서도 50살이 넘으면 할 일이 못된다고 말한다. 어린 사람들 앞에서 굽신거리는 일이 자존심 상하지 않겠냐는 것.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각설이를 할 것인지.
“그럼요.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힘이 있을 때까지 해야죠. 지금도 전국 어디든지 민원이 없는 자리를 보장하고 초청하면 갑니다. 미리 연락만 주면 동료들까지 5~6명씩은 같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거든요”
인터뷰 내내 자신의 각설이 인생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김현태씨.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국의 명물 각설이 ‘방실이’. 기자는 자신의 직업에 이토록 자부심을 갖는 사람을 근래에 본적이 없다. 따듯한 봄날의 용인오일장이 기다려진다. 장터에서 그를 만나면 흥겨운 각설이 공연도 보고 추억의 엿 맛까지 볼 수 있으니. 게다가 사람사는 훈훈한 세상까지 덤으로 느낄 수 있으니, 그는 분명 세상에 즐거움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