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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협곡 |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석가장(石家莊)으로 간다. 석가장(石家莊)은 춘추시대에는 위나라에 속했고 전국시대에는 조(趙)나라에 속했고, 조괄이 죽은 곳이기도 하다. 조괄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 사람. 조사(趙奢)의 아들로 마복자(馬服子)라 한다. 그는 병법(兵法)에 관한한 모르는 게 없다. 그런데 그는 공부만 잘하는 헛똑똑이란 사실이다. 조나라 효성왕(孝成王) 6년 진(秦)나라의 반간계(反間計)가 적중해 조괄은 염파(廉頗)대신 장군에 기용된다.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장군의 그릇이 아니라며 임금께 눈물로 간해도 안되자 재상 인상여(藺相如)께 부탁을 해 또 간하지만 임금이 본 조괄은 너무도 똑똑했다. 조괄 모(母)는 임금께 한통의 각서를 받아낸다. 아들이 전쟁에 패해서 조군 병사 수십만 명이 떼죽음을 당해도 그 죄를 가족에게 까지 묻지 않는다는 조건의 각서를 받아 두고서야 아들의 출전을 눈물로 지켜본다.
조괄은 전장에 나가 염파의 수성(守城)전략을 버리고 전면 공격에 나섰다가 진나라의 장수 백기(白起)에게 포위되자 탈출을 시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는다. 천재의 죽음 치곤 너무 허망했다. 조나라의 군사 40여 만 명도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그런 역사를 간직한 석가장은 전국시대 조(趙)나라 서울이고 하북성(河北省)에 있으며 한단지몽(邯鄲之夢) 한단지보(邯鄲之步)등의 고사(故事)가 생겨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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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
드디어 우공이산의 본거지 태항산 팻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 서쪽에 위치한 태항산은 조선독립동맹과 그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의 마지막 항일무장 투쟁근거지다. 의열단 활동 총수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항일활동을 벌인다. 1938년 김원봉의 노선에 반기를 든 최창익은 의용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마오쩌둥 휘하인 연안으로 간다. 42년 김원봉과 무정. 400여명은 조선 독립을 위해 조선의용대를 확대한 조선의용군을 세운다. 조선의용군의 첫 근거지가 태항산이다. 이들은 갖은 고초를 견디며 팔로군의 지원을 받아 유격활동을 편다. 격정시대를 쓴 혁명작가 김학철은 이 전투지역에서 다리 부상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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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베이터 |
그 앞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나라 때 중국문단의 중심인물로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한유<韓愈(768-842)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 본관은 창여(昌黎)이며 하북성 통현(通縣)사람. 3세 때 고아가 되어 형수 정(鄭)부인 손에 성장.>는 벗 이원(李愿· 무녕절도사로 파직 반곡에 은거)을 반곡으로 돌려보내며「送李愿歸盤谷序」글을 짓는다. 태항산(太行山) 남쪽 자락에 반곡(盤谷)이 있다.
반곡의 사이는 샘물이 달고 토양이 비옥하여 초목이 무성하여 사는 사람이 적다. 혹자 왈 “두 산 사이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반(盤)이라 한다.”하고, 다른 이는 “터가 그윽하고 산세가 막혀 있어 은자(隱者)가 노니는(盤旋)곳이다.”한다. 친구인 이원(李愿)이 그 곳에 산다.이러한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산을 옮긴 우공의 은덕이다. 비경(秘境)이라해야 하나. 절경(絶景)이라해야 하나. 태항산(太行山)을 대면한 첫 느낌은 태항산의 그 쩌는 오만함이다. 이름 그대로 큰 산들이 겹겹이 늘어선 모습은 그야말로 그냥. 아……! 로 끝난다. 비경과 절경을 합친 비절이랄까.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전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산. 태항산은 황산에 비해 덜 알려진 산이기에 사람 손이 덜 탄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남북 600㎞, 동서로 250㎞에 걸쳐 뻗어 있는 태항산을 민 낮으로 본다는 것은 확실히 팔자 좋은 소리임에 틀림없다. 비록 태항산의 관광 인프라는 많은 부분 부족하다 못해 낯설지만 오히려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태항산의 백미(白眉)는 산맥 끝 부분에 자리한 뼝대다. 태항산 대협곡으로 불리는 뼝대는 길이가 약 45㎞에 이르며 웅장한 협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동양의「그랜드캐년」이라 불린다. 협곡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최대 표고차가 1000m에 이를 만큼 산세가 급강하이기 때문에 더욱더 절경이다. 태항산 대협곡에는 빼어난 경치가 많은데 복사꽃이 핀 골짜기라는 도화곡.
천길 낭떨어지에 홈을 파서 만든 잔도(棧道)를 한참 걸어가면 구련 폭포에서 마무리 되는데 걷는 내내 느낌은 그냥 감탄사 한마디가 전부다. 이곳은 반드시 하루를 내어 걸어가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간간이 현지부민이 파는 계곡 좌판에 한국 돈 이천 원을 주면 과일을 한 아름 살 수 있다. 대추가 참으로 맛나던데 약간 과장해서 어린아이 주먹만한 대추를 먹으며 구경하는 것도 제법 달콤하다.
빵차를 타고 가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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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계산 |
빵차로 도화곡 풍경구의 도화촌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버스를 타고 왕상암 풍경구까지 이동한다. 해발 1000m 위에 천길 낭떠러지를 아래로 굽어보면서 달리는 빵차는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신나고 손가락은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바쁘다. 여기서 기절초풍할일 한 가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대협곡 절벽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은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치열해야하는가를 보여주는 절정이 아닐 수 없다. 태항산 대협곡 해발 1200m 고지 절벽에 잔도 식으로 돌출시켜 만든 전망대에 도착하면 발밑에 약 10m정도의 강화유리로 만든 스카이워크가 있는데 끝이 안 보이는 발아래 절경을 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어디 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여기서 사진 한 방 찍고 또 빵차를 타고 15분 쯤 이동을 하면 부운정에서 왕상암으로 가는 길인데 옥황각을 지나 조금은 완만한 길을 거치면 스릴만점의 최고 난코스 나선형 계단이 나타난다. 수직계단이므로 현기증을 느낀다. 심장이 약하거나 무릎 관절이 있는 분은 차로 이동을 권한다.
그리고 태항산 대협곡 남쪽 구련산(九蓮山)으로 간다. 봉우리 아홉 개가 연꽃처럼 보인다고 해서 구련산이라 하는데 운해(雲海)가 깔리면 구름과 봉우리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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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곡굴 |
구련산 풍경구의 하이라이트인 회룡천계산은 만선산과 이웃하며 왕명령을 관통하는 10km코스이다. 태항적자(太行嫡子) 장영쇄(張榮鎖) 촌장이 주민을 위해 스스로 해발 1000m의 천계산 절벽에 5년(1992년~1997년)에 걸쳐 1200m의 터널을 비롯해 20년 동안 태항산에 산길을 만들었다. 2002년 10대 감동 중국의 인물로 선정되어 후진타오로부터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천계산으로 올라오는 터널 입구에 장영쇄와 함께 일한 사람들의 13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장쾌한 천호폭포·하늘문'천문구'
전동카를 타고 멋진 절경을 360도 돌면서 태항산의 멋진 절경과 장엄한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또한 구련산에는 높이 120m의 천호폭포와 웅장한 하늘의 문과 같은 천문구, 소박한 원주민들이 살고있는 서련촌, 계곡을 따라 아름다운 폭포가 이어지는 선지협 등 곳곳에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져 있다. 천호폭포를 지나 160m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며 투명 유리를 통해 아슬아슬한 천길 절벽 풍광을 감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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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영(한학자 ·본지우농의세설 연재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