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위나라 군주 영공은 위나라 32대 군주다. 춘추좌씨전 소공 7년조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는 드물게 출생 기록이 전해지는 인물이다. 위 영공은 공자와 동시대 인물로 공자보다는 나이가 무려 11세나 연하다. 그는 기원전 534년 그의 나이 7세 때 군주의 자리에 올라 기원전 493년 4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장 42년에 걸쳐 군주의 자리를 지킨 인물이다. 그가 죽을 때 공자의 나이 59세다. 7세부터 48세 나이에 이르도록 군주로서 위나라를 다스렸는데 권모와 술수의 시대였다. 폭력과 전쟁이 정당화되는 패도의 세상에서 무지하기 짝이 없고, 혼미하기 이를 데 없는 위영공임에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백성들이 배고프지 않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을 잘 써서였다는 게 논어의 평가다. 공자께서 노나라 실권자 계강자와 시국을 논하는 장면에서 위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유가 대화 중에서 나온다. 논어헌문편 14-20문장에 그 기록이 있으니 공자께서 위나라 영공은 무도한 자라고 말하자 계강자가 이렇게 되묻는다. “그 정도의 무도한 인간이 군주로 있는데 어째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겁니까?” 이에 공자는 “제1대부 공문자가 외교를 다스리고, 제
[용인신문] 백성들의 안녕과 백성들의 넉넉한 삶을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이를 실천하면서 무력이나 법의 논리가 아닌 예와 덕을 통해 백성들을 돌아보는 정치, 이른바 맹자가 말한 ‘왕도정치’다. 그래서 내가 저지른 행동이 내 마음에 비추고 너의 마음에 비추어 봐도 결코 부끄러움이 없을 때 비로소 남을 다스릴 수 있다는 데서 맹자가 말하는 민본주의 기본은 시작된다. 나도 부끄럽고, 너도 부끄럽다면 그런 사람은 누군가를 다스리는 위치에서는 곤란하다. 맹자가 말하는 민본이라는 것은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백성들보다 못한 도덕률과 청렴성에 한참도 못 미치는 오염(?)의 의혹이나 받는다면 백성들은 그가 갖는 권력에 두려운 나머지 입 다물고 고개 숙일 뿐이지 마음으로는 아닐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첫 번째 덕목으로 수신을 말한다. 요즘이 어느 땐데 아직도 수신제가 운운하느냐 하겠지만 인류가 공자를 말하고 맹자를 말하는 데는 단 하나의 이유만 존재한다. 인류는 아직도 공자나 맹자를 대체할 인물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작금의 우리나라는 그 옛날 케케 묵었을 것 같은 치자
[용인신문] “가난은 임금님도 구제 못 한다.”라는 말을 마치 경전의 한 부분인 양 입에 달고 살던 시대가 있었다. 그것도 남도 아닌 가난 당사자 백성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가난은 백성들의 몫이고, 가난은 백성들만이 해결해야 하는 숙제와 같은 것으로 당연시되는 임금이 주인이던 시대에는 이 말이 일견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이 주인인 시대에는 조금은 달리 해석될 수도 있는 부분 이기도 하다. 지금은 패도니 왕도니 이런 시대가 아니다. 그야말로 민주사회다.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세상인 것이다. 문제는 주인으로서의 생활을 사느냐에 방점이 있는 거다. 왕도시대든 패도시대든 백성들의 의사에 관계없이 군주가 선다는 점이고, 요즘 세상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권좌에 오르는 세상이다. 그 사람이 똑똑하든 아둔하든 그건 그리 중요치 않다. 무슨 짓을 하든 국민 개개인으로부터 선택의 증명 낙인 도장 한 개만 받아내면 누구든 법이 정한 임기 년 수 만큼은 떵떵거리며 산다. 이 땅의 관련 법이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에 다수의 국민들도 동의한 거고 선택당한 자의 과거가 어떻든 그건 별개다. 국민 개개인으로부터 도장 한 개를 받아냈느냐 아니냐의 결정만 존재할 뿐
[용인신문] ‘공부는 끝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공부하는 사람은 많으나 끝이 없을 정도로 공부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공부는 늘상 반복인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꼭 새로움에 방점을 찍는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술이편7-27문장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술하는 폐단이 내게는 없다. 많이 들어서 그중에 옳은 것은 따르고, 또 많이 읽어서 이를 마음에 새긴다면 이것이 진실로 아는 것에 그 다음쯤 될 것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자신은 날 때부터 아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배워서 아는 자라고 밝히고 있다. 공자는 하루를 몸을 깨우고 지성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한 인물이다. 인류에 각 나이별로 이른바 10년의 법칙 열길 우물론 같은 10년 터울로 어떻게 살다 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간 인물 또한 공자이다. 그가 70세에 이르러 고백했다는 자술에 따르면 그는 15세에 이르러 공부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30세가 되니 서는데 부족함이 없었으며 40세가 되니 그 무엇에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비로소 50세가 되어서야 하늘을 알았다고 했다. 60세가 되니 다양한 인생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했고, 70세가 되어서야 마음이 하고자
[용인신문] 위나라 대부 극자성이 이재와 언변에 빼어난 자공에게 말한다. “군자는 바탕만 갖추고 있으면 될 일이지, 그깟 겉 무늬만 그럴싸하게 꾸민대서야.” 하니 자공이 크게 애석해하면서 짐짓 나무라는 말투로 말한다. “한번 뱉은 말은 그 빠르기가 네 필의 말로도 따를 수가 없거늘 어찌 그런 실언을 하시는가.” 그러면서 답을 말하길 “겉 무늬도 본디 바탕만큼 중요한 것이고 바탕도 무늬만큼 중요한 것이다.” 본래 이문장은 논어 옹야편 6-16문장이 출전으로 공자의 말에서 그 시작이다. 쉽게 풀어쓰면 이렇다. 하루는 공자께서 말씀하신다. 바탕이 무늬보다 나으면 성품은 자칫 얕을 수 있고 무늬가 바탕보다 나으면 성품 또한 모가 날 수 있으니 군자라면 무늬와 바탕이 조화가 있어야한다. 공자께서 말하는 바탕과 무늬는 넓은 의미에서 위정자에게 주는 백성을 향한 정치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곧 조화는 예를 으뜸으로 하여 화목을 귀하게 여긴다고 논어학이편은 말하고 있다. 육덕명은 조화를 일러 위정자의 언어라 규정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들을 화목하게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곧 먹을 것을 풍족히 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위정자의 마음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그건
[용인신문] 하루는 공자의 아들이 집 마당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데 아버지인 공자께서 불러 말씀하신다. “얘야. 너는 시를 읽었느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아버지의 돌연한 물음에 아들은 고개를 저으며 “아직 안 읽었습니다.”라고 하니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시를 읽거라. 시를 읽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느니라.” 이에 아들은 물러 나와 시를 읽었다고 논어는 기록한다. 이 문장은 천고의 스승이요, 만세 사표이신 공자님께서 아들을 직접 훈육하신 유일무이의 문장이다. 아들에게 시를 공부하라고 권하신 까닭은 무엇일까. 공자님 말씀에 따르면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삿됨이 없다.”이다. 이는 시를 읽어두면 “어느 환경과 처지든지 거기에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다.”쯤으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하루는 공자의 서열 세 번째 제자 자공이 묻는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고, 부자이면서도 교만함이 없다면 어떤지요?” 그러자 공자님께서 말씀하신다. “그쯤이면 괜찮다고 할 수는 있지. 그러나 가난하지만 예악을 공부하고 부자이지만 예를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지” 그러자 자공은 말한다. “그렇다면 공자선생님 말씀인즉슨 말을 할 때 옥을 쪼듯 다듬듯 갈 듯
[용인신문] 공자는 약소국 정나라에서 26년간 재상을 지내면서 최고의 복지국가로 만든 명재상 자산 공손 국교를 이렇게 평했다. 행동에 공손함이 있으며, 섬김에 공경함이 있으며, 백성에게는 은혜가 있으며, 백성을 부림에는 의가 있었다. 한번은 향리의 촌로가 얕은 강을 사이에 두고 저편 마을로 가기 위해 바짓가랑이를 걷어 건너고자 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수레에 태워 강물을 건네준 일이 있다. 군주 다음가는 2인 자가 그야말로 시골 백성을 자신의 수레에 직접 태워서 강을 건네주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고개를 끄덕이고도 남을 미담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본다면 공자의 평가대로 그는 백성들에게 은혜로운 건 맞다. 그러나 맹자의 시각은 다르다. 정치가는 그러한 사소할 것 같은 저렴한 몸짓이 아니라 다리를 놔 줘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언제고 백성들이 걸어서 혹은 수레로 그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맹자의 징책이다. 맹자가 정치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다. 보여주기식 쇼가 아닌 바른 정치 하라는 거다. 문제는 바른 이라는 게 백성들에게는 쉬운 일상인데 정치하는 저들에게는 그리도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실 정치라는 것은 크게는 남을 다스리는 행위이지만
[용인신문] 춘추시대 최고의 재상을 꼽는다면 아마도 ‘관중’이 으뜸일 것이다. 제나라 ‘환공’을 춘추오패의 1인자로 패업을 달성케 한 일등공신이다. 그의 정치철학은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왕양이 사상을 기본으로 국가가 강대국이 되려면 우선 먼저 백성들 개개인이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의 저술로 알려진 관자 목민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름지기 백성은 창고에 곡식이 가득차야 예절을 알며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 백성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라는 말이다. 곧 “먹는 것이 백성의 하늘이다.”는 말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정조대왕의 홍재전서 기록에 따르면 “백성이 배고프면 나도 배고프고 백성이 배부르면 나도 배부르다. (…중략…) 백성들이 편안한 자리로 옮겨간 뒤에야 내 마음도 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새겨둠 직한 말이 분명하다. 하루는 공자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인가와 한참 떨어진 태산 깊은 곳쯤을 지났다. 혹자의 부인이 울고 있어 자로로 하여금 연유를 물은즉, 아들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는데 얼마 지나지않아 남편도 시아버지도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한다. 그래서 슬프고 원통해
[용인신문] 모두가 아는 것을 혼자만 모르고 지금까지 왔다면 그건 ‘괜찮아’가 아니라 ‘무능’한 거다. 스치기만 해도 훤히 보이는 것을 혼자만 못 보고 지금까지 왔다면 그건 무능을 훨씬 넘는 기본이 안된 거다. 기본이란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줄 수 있는 벼리와 같은 거다. 공자의 막내 제자 자하복상이 공자께서 지으신 춘추를 강해하면서 설명하던 내용 중 “낮은 자리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줄 모르는 윗사람은 위태롭다.”라는 경책이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강해를 듣던 문도 중에 벼슬하는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줘도 받아서는 안 될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직위’이다. 공부라는 것은 자신의 무지의 한계가 드러날 때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나 직위라는 것은 자신의 무지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위까지 이르러서는 결코 안된다. ‘높은 자리에 있다’라고 할 때 그 자리는 묻는 자리가 아니다. 요임금 말년 때쯤 홍수가 심하여 나라 안 백성들이 죽고 떠내려가고 난리도 아니었다 한다. 요임금은 곤이라는 사람이 그 방면으로 꽤 안다하여, 그를 불러 높은 직책을 주며 치수 관리를 맡겼다. 곤은 현자들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물어 답을 찾고자
[용인신문] 노나라 실세이자 재상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으니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정치란 바른 것이다. 재상의 지위에 있는 그대가 솔선하여 바르다면 감히 누군들 바르지 않겠는가.” 이 말은 정치가의 자격 이전에 품성을 말하는 거다.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또는 이미 정치에 들어섰다면 우선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바르냐 그르냐를 알라는 말이다. 바르지 못하다면 어쩌나. 그렇다면 늦은 감은 있으나 그럼에도 그 세계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된다. 아니 막말로 저도 바르지 못하면서 백성들에게 바르게 살라며 종주먹댄다면 그건 참 가관을 넘어선 꼴불견일 게다. 자신은 못된 짓을 태산보다 높이 쌓아놓고, 물론 이건 의혹일 뿐이라고 말은 하겠지만. 암튼 백성들의 병아리 눈물만큼도 안되는 허물을 범죄라고 잡아들여 처벌한다면 그게 어찌 백성을 위하는 정치란 말인가. 천하의 몹쓸 말종인 것이지. 정치의 원리는 간단하다. 군군신신부부자자라 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신하는 신하의 일을 할 것이며,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야만 자식은 자식 노릇이 온전해지는 거다. 그러나 뒤가 구린 군주들과 벼슬아치들을 만나면 법으로만 이끌고 형벌로만 다스리니 백성들은 요리조리 피하여 안 걸리기만
[용인신문] 옛사람들은 수신에 이르기에 앞서 격물과 치지와 성의와 정심으로 내면을 다스려 놓은 후에 수신 공부에 이른다. 수신 공부라함은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에 이르는 첫 학습 단계인 셈이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주周나라를 중심으로 여러 제후국을 두어 나라를 통치했는데 제후국들의 작위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南 등 다섯 등급으로 나뉜다. 이렇게 나눠진 제후들이 다스리는 영토를 국國이라 하고 제후들은 위임받은 국을 또다시 나누어 대부들에게 관리하도록 하는데 이를 가家라 한다. 논어에서 노나라의 맹손가 ‧ 숙손가 ‧ 계손가 ‧ 삼가가 이를 말함이다. 그런데 이 가를 관리 즉 다스림에 있어서 자격이 있는데 곧 제가齊家를 이룬자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풀어쓴다면 위로는 부모님을 성심으로 모시며 조상에 대한 신종과 추원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그리고 좌우로는 형제, 배우자와 더불어 돈독한 우애에 흠은 있지 않은가. 아래로는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행여 소원하지는 않은가 등등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윤리나 도덕적으로 의혹 내지는 결격 사유가 있다면 그런 자는 백성들을 다스리거나 관리할 위치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게 옛사람들의 생각이다. 옛말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용인신문] 예는 민본주의를 기본으로 공자의 덕치예교 사상에 대한 실천덕목으로 가는 도덕적 첫 관문인 셈이다. 맹자는 군주의 제일 덕목을 백성의 등따습고 배부름에 기초한 왕도정치로 규정한다. 그 첫 관문이 또한 무흠을 전제로 한 도덕성이다. 군주와 군주를 둘러싼 가족과 측근들이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하다가 아니라 맑지 못하다거나 흐리거나 혼탁하거나 의혹 같은 것만 있다 해도 그런 군주는 백성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더 나아가 갈아치워 백성의 뜻을 존중하는 군주를 세워야 한다는 게 맹자의 생각이다. 그 옛날, 무지했을 것만 같았던 시대에도 이런 개명한 생각을 했다 하니 놀라운 일이다. 이는 예가 무너짐에서 비롯됨은 아닐까. 논어에서 예를 처음 말한 이는 공자의 제자 유자이다. 논어 학이편 1-12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군주가 예를 백성들에게 사용함에 있어서 예의 쓰임은 화를 귀하게 여긴다. 여기서 화는 화목할 화和를 쓰는데 송나라 육전의 풀이에 따르면 화和는 벼화禾에 입구口라 하여 백성들은 먹을게 풍족해야 화목할 수 있다 한다. 제나라 환공 때 명재상 관중도 “백성을 예로 다스리되, 그 첫 번째 조건은 백성들의 집마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