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7 작은 상자 바스코 포파 작은 상자에 처음으로 젖니가 나고 짧은 길이와 좁은 넓이와 작은 공허 그리고 그 밖의 여백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 작은 상자는 계속 자란다 그녀의 안에 들어 있던 찬장은 지금 작은 상자 안에 있다 그녀는 커지고 커지고 더 커지며 자라난다 이제 방은 그녀의 안에 들어와 있고 집과 도시와 대지도 이전의 그녀가 알던 세계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작은 상자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 다시 그녀는 작은 상자가 되었다 이제 작은 상자 속에는 축소된 전 세계가 있다. 당신은 그것을 쉽게 주머니에 넣을 수 있고 쉽게 훔칠 수도 쉽게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작은 상자를 조심하라 -------------------------------------------------------------------- 낯선, 새로운 시편이지요. 포파의 이 시는 테드 휴즈의 시 입문서 ‘시란 무엇인가’의 앞머리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휴즈의 이 책은 저자가 진행했던 시 수업의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요. 그가 이 작품을 우선적으로 소개한 이유는, 시에 대한 정의와 연관이 깊습니다. 그러나 시는 정의 내려지는 순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6 반성 100 김영승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면서 얘기했다. ................................................................................................................................................. 연탄, 그저 연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기 어렵지요. 그렇게 무른 살결로 그렇게 따뜻할 수 있다니. 오늘의 주인공은 셋, 연탄장수인 아빠와 두 딸이 나옵니다. 우리는 시의 초입에서, 그들이 가야할 집이 골목 끝이 아니기를 바라게 되지요. 숨을 몰아쉬었겠지만 무사히 도착했다니 다행 입니다. 하나 둘 셋…. 딸이 아빠에게 전하는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라는 말은 추측일까요, 다짐일까요. 분홍 소녀들이 검은 연탄을 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5 뜰힘 이현호 새를 날게 하는 건 날개의 몸일까 새라는 이름일까 구름을 띄우는 게 구름이라는 이름의 부력이라면 나는 입술이 닳도록 네 이름을 하늘에 풀어놓겠지 여기서 가장 먼 별의 이름을 잠든 너의 귓속에 속삭이겠지 나는 너의 비행기 네 꿈속의 양떼구름 입술이 닳기 전에 입맞춤해줄래? 너의 입술일까 너라는 이름일까 잠자리채를 메고 밤하늘을 열기구처럼 솟아오르는 나에 대해 ................................................................................................................................................. 가을 하늘, 몇 겹의 파란 종이. 시인은 우리에게 새, 구름, 입술, 별, 비행기에 대해 속삭입니다. 그 속삭임에는 존재의 동력에 관한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지요.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장미는 장미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향기롭다’고 했습니다. 과연 새와 구름 그리고 별이 하늘에 머무를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질문을 잠시 접어두고, ‘나’는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잠든 ‘너’에게 아득한 별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4 가구의 힘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3 속수무책 김경후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하고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 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독서 중입니다, 속수무책 ................................................................................................................................................. 우리에게는 인생을 함께 하는 수많은 책이 있지요. 시인은 오늘 단 한 권의 책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은 듯 합니다. 과연 책 읽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과 관련이 깊겠지요. 그런가하면 책과 혁명의 연관성에 관해 주목할 만한 목소리를 낸 바 있는, 일본의 한 사상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기고 있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2 칠 조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칠 조심”― 내 마음이 조심하지 않는 바람에 내 기억은 종아리와 뺨과 팔과, 입술과, 눈에 온통 얼룩져 버렸다. 내가 너를 그 모든 성공과 실패보다 더 사랑한 것은 너와 함께 있으면 누르스름한 흰 빛이 하얗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 어둠 또한 친구야, 맹세하건대, 어떻게든 하얗게 될 거야, 헛소리보다 전등갓보다도 이마에 감은 흰 붕대보다도 더 하얗게! ................................................................................................................................................ 가을이 왔지만 수선스러운 마음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그토록 조심하지 못했던, 혹은 않았던 걸까요. 오늘의 시는 “칠 조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사뭇 결연하기만 합니다. 종종 아니 수시로 우리가 마음을 돌보지 못하는 사이, 기억은 온 몸에 흔적과 얼룩을 만들어 내곤 합니다. 사회적 기억 또한 같은 이치로 작동하는 것이겠지요. 시적 주체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1 나는 저 아이들이 좋다 이성복 나는 영혼에 육신을 입히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너무 사랑했다. -세르게이 예세닌, 「우리는 지금」 나는 저 아이들이 좋다. 조금만 실수해도 얼굴에 나타나는 아이, “아 미치겠네” 중얼거리는 아이, 별 것 아닌 일에 ‘애들이 나 보면 가만 안 두겠지?’ 걱정하는 아이, 좀처럼 웃지 않는 아이, 좀처럼 안 웃어도 피곤한 기색이면 내 옆에 와 앉아도 주는 아이, 좀처럼 기 안 죽고 주눅 안 드는 아이, 제 마음에 안 들면 아무나 박아 버려도 제 할 일 칼같이 하는 아이, 조금은 썰렁하고 조금은 삐딱하고 조금은 힘든, 힘든 그런 아이들. 아, 저 아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내 품에 안겨들면 나는 휘청이며 너울거리는 거대한 나무가 된다. ................................................................................................................................................. 좋다, 라는 말 참 좋지요. 그 어떤 말보다 투명한 말인 것 같습니다. 실수가 아닌 잘못, 잘못이 아닌 죄를 짓고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0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을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멀리서 가까이서 잘 익은 사과향. 당신에게 여치와 자전거 바퀴, 그리고 보랏빛 바람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요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9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 풀벌레들의 절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8 흑판 3 정재학 판서를 할 때 가끔 칠판에 비친 아이들의 얼굴에 씌어진 글자들이 보일 때가 있다. ―우리는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는 교육만 받았지. 그 친구를 올바르게 이끌어주라는 교육은 받지 못했다. 돌아보면, 아이들의 얼굴이 쓱싹쓱싹 지워지고 있다. ................................................................................................................................................. 시인의 ‘흑판’ 연작시 중 하나입니다. 그가 현직 교사라는 사실이 시를 이해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주겠지요. 시적 주체는 말합니다. “판서를 할 때 가끔 칠판에 비친 아이들의 얼굴에/씌어진 글자들이 보일 때가 있다”고 말이지요. 도처에서 들려오는 문제들의 원인이 다음 문장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는 교육만 받았지./그 친구를 올바르게 이끌어주라는 교육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한 사회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마다,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넬슨 만델라는 “교육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7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이제니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탁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탁자가 필요하고 의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의자가 필요하고 그릇이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그릇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누군가가 필요하고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수프 속에 둥둥둥 떠 있고 알갱이마다 생각나는 얼굴 몇 개 죽었고 사라졌고 지워졌고 이제는 없으니까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 알갱이 알갱이 당신이 알갱이를 볼 수 있는 건 알갱이를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어쩌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조금은 그리운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 입추, 가을에 들다. 우리 따뜻한 수프 한 그릇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6 병원(病院)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시의 윤리’에 관한 이야기.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자필시집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요. 절친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