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110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 모든 절기가 그러하겠지만, 그 어느 절기보다 ‘마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바람결이 서늘해지고 우리의 내면도 깊어져만 가지요. 시인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에 대해 적고 있지요. 그는 등단 당시 한 인터뷰에서 촌스럽더라도 작고 소외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습니
꽃잎 차성환 꽃잎을 뜯으면서 나는 비늘이 돋고 꽃잎을 뜯으면서 비린내 나는 꽃잎의 살점을 삼키고 꽃잎은 입 속의 혀처럼 내 안에 피고 지고 나는 꽃잎 속에 있고 꽃잎은 낯설게 꽃잎의 이름으로 불러줄 것처럼 가만히 꽃이 잎으로 달려가 꽃잎이 되고 꽃잎을 뜯으며 꽃잎은 사라지고 나는 꽃잎이 자라는 방식으로 슬퍼지고 바닥에 주저앉아 쓰러진 꽃잎의 자리를 외우는데 이제 아무도 꽃잎이 자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꽃잎은 여기 서서 꽃잎은 내 몸속의 꽃잎은 숨을 가두고 나는 강물처럼 꽃잎을 삼키고 꽃잎은 가만히 나를 뜯어 꽃잎이 지는 하늘에 꽃잎은 꽃잎으로 꿈꾸는 방법을 누군가에게 배우고 꽃잎이 꽃잎으로만 남을 수 있게 나는 지는 꽃잎을 불러 모아 여기 소름 돋은 꽃잎을 입술에 피워 무는 꽃잎, 꽃잎 -------------------------------------------------------------------- 환절기, 가고 있는 절기와 오고 있는 절기의 동시적 시간. 백일 동안 붉다는 꽃나무도 이제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네요. 얼마나 애틋한 마음이기에 백일 동안 붉을 수 있을까요. 백일홍의 꽃말은 ‘인연’. 어쩌면 세상의 모든 꽃은 같은 말을 전하고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108 나무와 까치 이상호 높은 나뭇가지에 세 들어 사는 새 세도 안 내고 집짓고 새끼 기르며 살기가 영 민망한지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까치발로 조심조심 걸어드는 새 그 마음을 아는지 나뭇가지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걸 쭉 지켜보는 하느님도 말없이 따뜻한 어둠을 펴서 함께 덮어준다 -------------------------------------------------------------------- 한국 시사의 도저한 흐름 속에서, 이상호 시인은 서정의 문법을 내면화하고 이를 창조적으로 변용시킨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서정 시인이다. 그의 여덟 번째 시집 『마른 장마』(시로여는세상, 2016)에 담긴 시인의 말을 통해 우리는 시인의 시적 지향점을 만나볼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가 마음에 차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진다. 마음이 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시심의 물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는 탓이리라. 두렵다. 발길 드문 산속 조그만 옹달샘 같은 이마저 고갈될까 문득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무엇보다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지점은 ‘시가 마음에 차기를 기다리는 시간’일 것이다. 오늘의 시편을 만나보자. 시
평형수를 충만할 때 이원오 배가 기울어졌다 모든 기울기는 결핍을 수반한다 결핍은 모자람이 아니며 과잉의 동의어이다 배의 기울기에는 숨겨놓은 탐욕의 과잉이 있었다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실종이 있었고 비겁한 잉여의 민낯이 있었다 짠물에 민물을 일치시키던 수평 거친 파도를 이기는 힘이었고 결별을 허락하지 않은 마지노선이었다 힘은 무릇 수평에서 왔으나 견고한 욕심의 무게는 수평을 짓눌렀다 모두 기울기를 저울질하고만 있었으니 고박하지 않은 양심도 풀어져 버렸다 그날 서해바다에서 찔끔찔끔 흘려버린 물의 기울기는 거친 맹골수도에서 가팔라졌다 잃어버린 눈물의 평형수만큼 피눈물로 꼭꼭 채워넣어야 했다 지금, 당신의 평형수를 충만해야 할 시간이다 -------------------------------------------------------------------- 아득해질 만큼의 더위, 무탈하신지요. 오늘의 시인에게서 삶의 ‘평형’에 대해 한 수 청하고자 합니다. 전제는 그러합니다. 모든 기울기에는 결핍이 수반되어 있지요. 아름다운 ‘편애’조차도 이미 한 편으로 치우쳐 있는 것처럼.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균형’에 대한 의식이며 감각일지도 모릅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06 내 인생의 책 이장욱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 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 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 (…) 제목이 없고 결론은 사라진 나는 혼자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가 골목에 내놓았는지 꿈속의 우체통에 버렸는지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멈춘 딱 한 문장에서 -------------------------------------------------------------------- 염천을 능멸하며 피는 능소화도 이제는 피고지고, 그래도 생은 계속됩니다. 시인은 ‘인생의 책’에 대해 말하고 있네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철학적 명제. 그러나 문학적 명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과연 ‘인생의 책’에
통영 ― 책 이은봉 무엇인들 책이 아니랴 오랜만에 들린 통영에서도 보고 배울 책은 많았다 구중서 선생님과 통영에 놀러가서는 먼저 박구경 시인이 소개한 ‘호두나무실비집’이라는 책부터 읽었다 정가 2만 5천 원인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맛있는 음식을 과식하지 않고 먹는 법이었다 빠른 리듬에 쫓기다 보니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지난 뒤에야 겨우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식욕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까 배가 불러 힘들어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김덕우 시인이 소개한 또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한산 호텔 부속 횟집’이라는 책이 그것이었다 이 책에는 첫 페이지부터 과식은 당뇨병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씌어 있었다 책의 내용은 어렵지 않았지만 책의 내용대로 살기는 어려웠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지키지 못한 셈이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달라 통영에서도 내내 괴로웠다 끝내는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고 말았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내 오랜 병통, 통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 오늘의
토란잎 송찬호 나는, 또르르르……물방울이 굴러가 모이는 토란잎 한가운데, 물방울 마을에 산다 마을 뒤로는 달팽이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길이 있고 마을 동남쪽 해뜨는 곳 토란잎 끝에 청개구리 청소년수련원의 번지점프 도약대가 있다 토란잎은 비바람에 뒤집혀진 우산을 닮았다 그래도 토란잎 대궁 아래 서면 비가림 정도는 충분하다 (…) 지난 여름 소나기가 토란잎을 두드려 드럼을 연주하는 가설무대가 선 적 있다 한 달간 소나기가 계속되었고 그 다음 한 달은 폭염이 세상을 지배했다 (…) 그리고 지난 여름, 토란잎을 둘러싼 탱자나무 울타리에 커다란 해일이 일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소한 뉴스도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를 뚫고 넘어오지 못했다 다만, 아무도 다치지 않은 채 오직 탱자나무 가시만 홀로 아팠다 그러고 훌쩍, 여름은 지나갔다 언제나, 물방울들은 토란잎 한가운데 모여 합창을 한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쉬임없는 물방울들의 합창 또르르르 또르르르 힘겨운 물방울들의 노젓기 토란잎, 이 배가 가 닿는 세상의 끝은 어디인가 나는 게으르게 언덕에 누워 아득히 하늘을 지나는 비행기를 본다 어디 저기에서 쓸만한 냉장고 하나 안 떨어지나…… -----------------
슬픔을 말리다 박승민 마을 영감님이 한 짐 가득 생을 지고 팔에서 막 빠져나온 뼈 같은 지팡이를 짚고 비탈을 내려가신다. 지팡이가 배의 이물처럼 하늘 위로 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꺼지기를 반복하는 저 단선의 봉분. 짐만 몇 번씩 길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길 안으로 돌아와서는 간신히 몸이 된다. 짐이 몸으로 발효하는 사이가 칠순이다. “말리다”에서 “말리다” 역(驛)까지 가는데 수없이 내다 버린 필생의 가필(加筆)이 있었던 것이다. ------------------------------------------------------------------ 한 사람에게는 한 생의 역사가 있지요. 시인이 그려낸 풍경에도 그러한 역사가 고스란히 자리합니다. 시 속의 ‘말리다’는 ‘물이나 물기가 다 날아가 없어지게 하다’와 ‘하지 못하도록 막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지요. 시인은 이를 동시적으로 활용해 슬픔에 응전하고 있습니다. 젖은 슬픔을 ‘말리면서’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서려’ 하는 것이겠지요. 평론가 고봉준은 시인의 첫 시집 『지붕의 등뼈』 해설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깁니다. “‘슬픔’이 박승민 시를 느리게 관통하고 있다. 슬픔의 정서와 슬픔의
MakeFan 부설연구소 MTOM마케팅연구소에서 주최하는 ‘SNS 생존 마케팅 강연’이 오는 7일(목) 오후 7시 전경련회관 컨퍼런스센터 3층 다이아몬드홀에서 진행된다. ‘사람을 살리고 꿈을 키우는 SNS 생존 마케팅’이란 슬로건으로 진행되며 일반 마케팅 교육에서 접할 수 없었던 SNS를 통한 실질적인 제품 판매시스템 교육이다. 기본적으로 SNS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아이템 하나로 어떻게 SNS 상에서 판매와 수익을 완성할 수 있는지 매출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제시한다. 이번 강연을 진행하는 정진혁 강사는 광운대, 경희대, 안양대 등에서 온라인 창업 과정 겸임교수로 활동했고 소상공인 협회 마케팅 담당 강사로 온라인 시니어 창업과정 강사로 활동했다. 정진혁 강사는 이번 강연을 “SNS 생존 마케팅 수업은 크고 거창한 기업 마케팅이 아닌 일반인들이 일상에서 누구나 활용 할 수 있는 쉬운 마케팅을 말한다”라며 플랫폼별 컨텐츠 활용법, 밴드, 옐로우 아이디, 모두페이지 등 다수의 사례를 통해 실전에 바로 적용 가능한 방법을 알려준다고 말한다. 또한 이 강연은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업체에게도 매출을 증가 시킬 수 있는 좋은 기
아몬드 나무는 아몬드가 되고 최서진 성실하게 자라는 아몬드 나무의 가지 끝에서 아몬드를 기다린다. 밤에도 열매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열매를 기다리는 꽃이 완성된다 꽃과 죽음은 함께 다가오는 것 발설하기에는 위험하지만 숨을 크게 내쉬면 꽃의 반대편에서 아몬드 냄새가 난다 이국의 어느 화실에서 늙은 남자가 꽃피는 아몬드 나무* 를 그린다 항상 봄도 아닌데 너무 많은 꽃, 방을 지나 바다로 꽃잎이 바다와 바닥에 한꺼번에 쏟아진다 물속에서 나는, 천사들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풍경은 홀린 듯 누가 다녀간 세계 눈이 파란 빈센트에게 주는 활짝 핀 희망 그리고 위로, 꽃과 푸른 시간이 만나 만들어 내는 세계 나는 아몬드 나무 오래된 외로움을 접어 잡지 못한 수많은 꽃잎을 날려 보낼 때 한쪽의 벽면을 채우는 그림이 완성 될 때 모두가 갑자기 하늘을 나는 코끼리처럼 가벼워질 때 벽을 완성하면서 벽을 질문을 눈치 채지 못하기로 한다 나는 벽 쪽으로 무너진다 아몬드 나무는 아몬드가 되고 *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고요한 파격의 시적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의 첫 시집 표제작 입니다. 시인에게 첫 시집은 세상을 향한 시적 선언. 시인
국수집 연가 김종경 허기진 수화를 주고받던 젊은 남녀 잔치국수 한 그릇 주문하더니 안도의 눈빛 건네고 있다 하루 종일 낯선 시선들 밀쳐내느라 거칠어진 손의 문장(文章)들은 국수 가락처럼 풀어진 때 늦은 안부에도 목이 메어 오고 후루룩 후루룩 국수발을 따라 온 몸으로 울려 퍼지던 저 유쾌한 목소리들 세상 밖 유배된 소리들이 국수집 가득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면 연탄난로 위에 모인 이국의 모국어들도 노랗게 익어 갈 것이다 혹여, 누구라도 이 집이 궁금해 찾아가려거든 낮달 같은 뒷골목 가로등 몇 개쯤 통과해야 한다 또 다시 막다른 슬레이트집 들창문을 엿보던 접시꽃 무리지어 고개를 주억거리고 누군가의 발자국보다 개 짖는 소리가 먼저 도착해 온 동네를 흔들 것이다 거기 푸른 문장들을 뽑아 삶아내는, 오래된 연인의 단골 국수집이 웃고 있을 것이다 -------------------------------------------------------------------- 여기 아름다운 풍경이 있습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국수집 연가. ‘허기진 수화’라니 그건 마치 ‘소리 너머의 음악’을 떠올리게 하지요. 오늘의 연인에게 잔치 국수 한 그릇은 특별한 의미로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9 의심하지 않은 죄 프리모 레비 그대는 단지 만년필을 준비하고 기다리면 된다. 그럼 마치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들처럼 새로운 영감이 그대의 영혼과 온몸을 휘감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재빨리 낚아채기만 하면 된다. 그대는 아직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고 할 일은 많이 남아 있다.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이 그대의 시작이다. 서로 먼저 불빛 가까이 다가가려고 다툰다면 오히려 무질서와 혼란만 불러올 뿐이다. … 작가란 얼마나 훌륭한 이름인가. 무려 6천 년이나 되는 오래된 이름이지만 항상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가. 엄격한 자기원칙이 필요하지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늘 자유롭지 않는가. 물론 글이 모든 순간에 필요한 건 아니다. 다만 좋은 벗들과 함께 바람 속을 걷는다는 마음으로 모든 준비를 하고 그대의 명령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그대 작가들이여, 글을 쓸 땐 부디 ‘의심하지 않은 죄’를 짓지 말라.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 투명한 여름, 프리모 레비를 만나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