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들어 친정부적 논조를 매개로 밀월관계를 유지해 오던 KBS와 조중동(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 보수신문이 최근 들어 갈등을 빚고 있다. 상식적으로 보면 매우 기이한 이 같은 KBS와 조중동의 갈등에는 오늘날 우리 언론계에 내재한 각종 부조리가 그대로 응축돼있다. 발단은 19일 KBS 이사회가 현행 40%인 광고 비중은 유지하되 수신료를 현행 2500원에서 3500원으로 40% 인상하는 방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데서 비롯됐다. 형식은 만장일치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우여곡절이 많았다. KBS 이사회는 당초 수신료를 6,500원 또는 4,600원으로 인상하되 광고를 폐지하는 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야당 측 이사들이 대폭 인상을 반대하자 인상폭을 줄이는 대신 광고 비중을 현행대로 유지하는 절충안을 택한 것이다. KBS이사회의 결정 소식이 전해지자 그간 수신료 인상에 반대해왔던 시민단체와 경향신문, 한겨레 등 진보매체는 즉각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보수매체인 조중동과 종편채널 TV에 진출을 희망하고 있는 경제신문 등도 기사와 사설 등을 통해 일제히 비판대열에 가세한 것이다. 진보매체와 보수매체 모두가 수신료 인상안에 반대하고 있는 모양새
야당인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난 이번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최고의 화제를 모은 것은 단연 티파티(Tea Party)였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욱일승천하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기세는 중간 선거의 패배로 개혁정책의 지속은 물론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번 선거에서 티파티가 도움을 준 후보 중 60여 명이 연방 상하원에 진출했다.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짐 디민트(사우스캐롤라이나주) 의원과 랜드 폴(켄터키주),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주) 후보가 대표적인 경우다. 티파티의 표적이 됐던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천신만고 끝에 겨우 당선에 성공했다. 티파티의 유래는 1773년 영국과의 독립전쟁 당시 보스턴에서 발생한 티파티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스턴 차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영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미국의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위장해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항에 정박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세 척에 실려 있던 차(茶) 상자를 바다에 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보스턴에서는 그 이전까지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해 간 영국 정부에 대해 조세저항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 운동은 보스
지방선거 참패로 위기에 처했다가 공정사회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기사회생한 이명박 정부가 최근 대통령 친구가 연루된 사건으로 다시 벼랑 끝에 섰다. 다름 아닌 천신일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천신일이 누구인가. 박연차 게이트 이후 또 다시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오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현 정권의 실세라 한다. 경남고 졸업 후 1961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천 회장은 농촌봉사 동아리인 한국농어촌문제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입학동기로 상과대 학생회장이던 이 대통령과 처음 만났다. 이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를 이슈로 한 이른바 63사태의 주역으로 함께 활동하며 우정을 쌓았다. 햇수로 치면 거의 반세기에 걸쳐 인연을 맺은 죽마고우임이 분명하다. 대학졸업 후 현대에 입사해 잘나가던 이 대통령과 중소기업을 차려 비교적 성공가도를 달리던 천 회장은 1980년대 후반에 같은 아파트에 살 정도로 절친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이 대통령이 정치권에 투신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고 한다. 특히 김덕규(전 국회부의장), 조홍규(전 민주당의원), 박정훈(전 민주당의원) 등과 최장집, 서진영 고려대교수 등 재재다사를 배출한 고려대 정외과 61학번 출신인 천
1포기에 만원을 훌쩍 넘는 바람에 금(金)배추로 불리던 배추값이 다행히 3000~4000원대로 하락했다. 가을 장마 등 이상기후와 지난해 배추값 폭락의 여파로 배추 재배량이 줄면서 전국을 강타한 배추파동이 몰아치는 지난 1달간은 생산자인 농민이나 중간유통자인 상인, 그리고 소비자인 시민 모두에게 불편한 시절이었다. 생산지인 농촌에서는 배추 1포기가 불과 1000원 내외에 출하되는데도 마치 농민들이 폭리를 누리는 것처럼 비치는데 대해 억울해했다. 농민들은 소출마저 줄어 사실상 실질 소득은 줄었는데 배추파동의 원인제공자인 것처럼 비쳐 황당하다고 하소연했다. 배추값이 폭등하자 일부 식당에서는 아예 배추가 모습을 감추었는가하면 김치찌개나 묵은지찜을 파는 식당에서는 일시적으로 김치가 주재료인 메뉴를 포기해야만 했다. 배추파동은 정치권도 강타했다. 야당은 배추값 폭등은 4대강사업으로 경작지가 줄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민노당 강기갑의원은 4대강 사업으로 인해 농사를 못 짓게 하는 곳이 전체 1000만 평이 넘는다며 낙동강 유역에 채소를 많이 생산재배하던 지역이 농사를 못 짓게 해 다 잡초에 묻혀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추파동의 압권은 이명박 대통령이 배추가 비싸니
필자같은 40~50대에게 한때 라면하면 단연 삼양라면이었다. 일본이 원조인 라면은 1963년 삼양식품이 국내에 처음 출시함으로써 한국에 소개됐다. 지금이야 가벼운 한 끼 식사의 대용으로 라면을 먹지만 삼양라면이 처음 선 보였을 때만해도 라면은 그래도 좀 형편이 넉넉한 가정에서나 맛 볼 수 있는 특급 간식처럼 여겨졌다. 1봉지에 10원이었던 삼양라면은 처음 한국인의 식성에 맞지않아 다소 고전을 했으나 우리 입맛에 맞도록 개량하고 그 간편성이 입소문을 타기시작, 1966년에는 연간 240만봉지, 1969년에는 1,500만봉지가 팔리는 등 급성장했다. 이후 삼양라면은 1972년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을 출시하는 등 탄탄대로를 걸어 시장점유율 40~50%를 기록하며 라면업계 선두를 달렸다. 하지만 삼양라면은 1989년 11월 우지(牛脂)라면파동을 겪으면서 급전직하, 부도위기에까지 내몰렸다. 라면 제조에 쓰이는 우지(쇠기름)가 식용이 불가능하다며 검찰이 기소하는 바람에 삼양라면의 시장 점유율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9년이라는 긴 법정공방 끝에 1997년 8월 대법원이 우지가 식용이 아니라거나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며 삼양라면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외교부 특채비리사건을 계기로 각종 고시제도를 포함한 공무원 충원방식 개선움직임이 결국 백지화됐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9일 고위당정회의를 열고 5급 공무원 특채 비율을 50%로 확대하기로 한 방안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최근 10년간의 평균비율인 37%선의 특채비율은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이는 특채비율을 50%로 확대할 경우 고위공직자 등 특권층의 공직 대물림을 보장하는 현대판 음서제도가 될 수 있다는 비판 여론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는 이에 앞서 지난달 12일 향후 3~4년에 걸쳐 5급 공무원의 절반을 특채로 선발하겠다고 발표했었다. 당정은 또 현행 행시제도의 명칭을 5급 공개채용 시험으로 바꾸고, 선발인원은 현행 수준인 260~300명 선을 유지키로 했다. 또한 현재 각 부처별로 이뤄지고 있는 5급 특채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행안부가 내년부터 채용박람회 형식으로 특채를 일괄 실시키로 했다. 구체적인 특채 선발규모와 시기는 정부의 인력수급 상황을 봐서 결정하기로 했다. 특채제도의 명칭도 변경하기로 했다. 정부가 국민여론을 받아들여 특채제도의 확대를 포기한 것은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아쉬움
일요일이던 지난 22일 낮 주말 뉴스거리를 챙기던 정치부기자들은 청와대에서 흘러나온 깜짝 놀랄 소식을 접하고 동분서주해야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알았던 하루 전 토요일(21일)에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청와대에서 비공개 오찬회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과 박 전대표의 회동은 그간 여권 내부에서 필요성만 거론돼왔을 뿐 성사여부가 불투명했던데다 회동 시기도 미묘해 단연 주목을 끌었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회동은 2007년 대선 이후 이번이 6번째이지만 지난해 9월 박 전 대표가 특사자격으로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와 귀국보고를 한 이후로는 처음이니 무려 11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이날 둘의 회동은 두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배석자 없는 둘만의 단독회동이었다는 점과 한나라당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는 회동결과 내용이었다. 먼저 단독회동에 관해서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시절에 비밀스럽게 이뤄졌던 여야영수회담처럼 뒷맛이 개운치 않다는 점에서 여론의 비난이 뒤따랐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시절에는 대통령과 야당 당수간의 회담이 끝나면 단독회동이라는 이유로 항상 밀약설, 뒷거래설 등이 난무했다. 이번에도 언론 눈을 피해
문민정부라 불리는 김영삼정부가 막 취임한 1993년 3월. 당시 한국일보 시경캡이던 나는 하루하루를 거의 뜬 눈으로 지새야했다. 시경캡이란 각종 사건을 다루는 사건기자의 팀장을 일컫는 언론계의 용어다. 30여년을 지속해온 군부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들어선 김영삼정부는 출범부터 의욕적인 사회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런데 문민정부가 시동을 건 개혁의 시동은 정말 엉뚱하게도 언론으로부터 불이 지펴졌다. 새 정부가 발표한 신임 각료들에 대해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인사검증보도에 나선 것이다. 언론의 인사검증 경쟁은 깨끗한 정부, 깨끗한 사회를 기치로 내건 문민정부의 실체를 해부해보겠다는 언론인들의 직업의식과 오랜 시기동안 정부로부터 억압받아왔던 언론인들이 모처럼 주어진 언론자유를 향유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가세함으로써 더욱 치열해졌다. 한 신문이 맨 먼저 김상철 서울시장(당시는 서울시장이 임명직이었다)의 부동산 투기의혹을 제기했다. 김상철이 누구인가. 내로라하는 인권변호사 출신인데다 40대라는 참신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정부 출범 조각의 하이라이트로 내세울 만했다. 하지만 그는 서울근교에 위치한 수려한 전원주택이 그린벨트를 무단 훼손해서 건축된 사실이 언
어릴 적 고향동네에서 한곳밖에 없던 이발소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는 멋진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가꾸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어서 이발소는 머리가 덥수룩한 어린 학생이 순식간에 까까머리로 환골탈태하는 마법의 방이었다. 뒤로 척 젖혀지는 3개의 의자가 놓여있던 이발소에 들어서면 언제나 향긋한 비누냄새와 두어 개의 신문, 그리고 그때만 해도 흔치 않았던 광석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흥겨웠다. 파란색과 빨간색이 동시에 세로로 돌아가는 이발소 표지판도 신기했지만 의사처럼 하얀색 가운을 입은 이발사들이 들이밀어 까까머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이발기계 바리깡도 이에 못지 않았다. 프랑스의 유명한 이발기계 제조회사인 바리깡에마르(Bariquand et Marre)의 일본식 발음이 그대로 전용된 바리깡이라는 기계가 대여섯번 머리를 왔다갔다하면 귀를 뒤덮던 더벅머리는 금새 사라졌다. 나는 어릴 적 머리를 깍을 일이 없어도 자주 이발소에 놀러갔다. 물론 이발소 앞집에 있던 구멍가게와 탁주집에 부모님 심부름 차 가던 길에 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발소에서 얻어 들을 수 있는 세상이야기도 귀가 솔깃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코미디언 출신 방송인 김미화씨가 KBS 내부에 나의 출연을 금지하는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주장해 일기 시작한 블랙리스트 파문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KBS 측은 그런 일 없다며 강력히 부인한 데 이어 7일 김씨를 상대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한 개인을 상대로 거대 방송사인 KBS가 즉각 반박하고 뉴스시간에 이 내용을 비중있게 보도한데 이어 형사고소까지 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KB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씨와 비슷한 뉘앙스로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한 진보 논객 진중권씨와 시사평론가 유창선씨도 역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방송가에서 블랙리스트가 문제된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이명박 정부 들어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인사들이 방송에서 퇴출됐다. 희극인 출신 MC 김제동씨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노제와 1주기 추모제 사회를 본 이후 출연하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뿐만 아니다.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로 입지를 굳혔던 정관용씨와 인기가수 윤도현, 김C 등도 석연찮은 이유로 공영방송에서 모습을 감췄다. 영화배우 문성근, 명계남씨도 일부 컬트영화를 제외하곤 캐스팅 되지 않아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오는 7월 6일은 전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때 7년 동안이나 국방장관으로서 월남전을 총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에선 흔치 않은 독특한 이름처럼 파란만장한 역정을 살았다. 우선 이력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한때 월남전 반전운동의 메카였던 버클리대에서 경제학,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하버드경영대학원 최연소 교수를 지내는 등 학창시절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캠퍼스에만 붙어있기에는 열정이 넘쳤던 것일까? 그는 30세 때인 1946년 포드자동차에 재무관리자로 영입된 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 포드 가문출신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의 포드자동차 사장직에 오른다. 사장 취임 1달 만에 케네디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국방장관에 취임한다. 그러나 정당성 없는 월남전에서 5만8000여 명의 무고한 미국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도록 빌미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그는 전범으로 지탄받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인생의 서막이었다면 그 이후의 삶은 더욱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그는 월남전 전략문제를 놓고 케네디의 후임인 존슨 대통령과 불화를 거듭하다 1968년 사
한편의 드라마 같던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막을 내렸다. 일단 겉으로 드러난 성적표만을 보면 한나라당이 대패하고 민주당이 완승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당초 여당이 일방적으로 리드하던 여론조사에 견주어 봐도 민주당이 환호작약하는 게 이해가 갈만하다. 이번 선거가 사실상 지옥 문전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생환한 셈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당이 승전보에 젖어 희희낙락하는 잔칫상에 잿밥을 뿌릴 생각은 없다. 나름대로 몇 가지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낸 점은 박수를 쳐 줄만하다. 먼저 민주당은 이번에 야당 및 시민사회단체와의 선거연대를 일정부분 성사시켰다. 비록 진보신당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가 끝까지 완주하는 바람에 모양이 구겨지긴 했으나 대부분의 광역단체장과 수도권지역 기초단체장 후보를 양보와 정책연합의 틀 속에서 후보단일화를 이뤄냈다. 이는 7월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소중한 자산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는 이른바 386세대인 송영길 인천시장 당선인, 안희정 충남지사 당선인, 이광재 강원지사 당선인을 배출해냄으로써 세대교체의 물꼬를 튼 점이다. 여기에 더해 사실상 야권 단일후보인 김두관씨를 지원해 경남지사에 당선시킨 점도 대단한 성과다.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