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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70여 년 지켜온 김 시인 자료들… 앞으로 어떻게 보존해야할지 고민”

김수영 시인 미망인 김현경 여사

김 여사가 오랫동안 아끼며 사용해온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한 평생 15번 이사 하면서도 단 하나의 유품도 잃지 않아
지금도 김 시인이 생전에 읽었던 책 등 꺼내 딲고 매만지고 
국립한국문학관 가기 어렵다면 용인지역서 관심 가졌으면

 

[용인신문] ‘김수영학’이 있을 정도로 한국 문학사의 거목인 김수영(1921~1968) 시인의 미망인 김현경 여사가 2024년이면 98세를 맞는다. 김수영에 대한 오롯한 기억을 가진 마지막 생존자라고 할 수 있는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유품에 대한 보존을 고민하고 있다. 최근 건강 악화로 병원을 드나들면서 간신히 정상으로 회복된 후 그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1949년 김수영과 결혼한 김 여사는 함께 지낸 세월보다 떠나보낸 세월이 더 길었음에도, 15번 이사를 하면서도 단 하나의 유품을 잃어버리거나 망가지거나 버린 게 없다.

 

“내가 거의 70년을 끌고 다녔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사 15번에……”

 

다만, 단 한 차례 도둑이 들어 괴짝에 보관하던 책들을 훔쳐간 적이 있을 뿐이다.

 

이제 70여 년을 지켜온 자료를 앞으로 어떻게 보존하느냐가 숙제다.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자택은 어쩌면 김수영 시인의 흔적이 깃든 마지막 거처가 될지 모른다.

 

# 김수영의 일거수 일투족 생생하게 기억

본지 발행인인 김종경 시인과 마북동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를 찾았을 때 100수를 바라보는 고령의 나이가 무색하게 또렷한 기억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김수영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낱낱이 설명했다. 김수영 생전에 연세대 특강을 갈 때 그에게 입혔던 감색 양복이며 손수 제작해서 매어주었던 회색빛 넥타이의 색깔까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녀는 지금도 김수영의 유품을 한결같이 닦고 매만진다. 그녀의 자택은 김수영 시인의 미니 문학관이다. 작은 방 책꽂이에는 김수영 시인이 생전에 읽었던 책이 자신이 젊은 시절 읽던 세계문학전집과 함께 가지런히 꽂혀 있다. 뿐만 아니라 김수영 관련 그림이나 사진이 김 여사가 젊은 시절 수집한 미술작품들과 함께 기품있게 전시돼 있다. 한쪽 벽면에는 손녀가 그린 김수영의 커다란 얼굴 스케치가 인상 깊게 걸려있다.

 

그녀는 김수영 시인의 유품을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잘 보존할지가 고민이다. 2018년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위탁하려고 마음먹었던 김수영 시인의 유품을 리스트와 함께 준비해놨지만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국립한국문학관은 2026년 개관을 목표로 추진 중이지만, 건립예산 부족은 물론 유품 가치판단 등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김 여사는 생전에 자신의 맘에 드는 김수영 문학관이나 자료실이라도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국립한국문학관에 가기 어렵다면 용인지역에서라도 문학 관련자나 박물관 등에서 유품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 첫눈에 시인의 위대성을 알아봤던 그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그녀는 100년 삶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첫눈에 김수영의 위대성을 알아봤던 그녀는 오로지 김수영을 지극정성으로 존경하며 지금까지 작은 메모지 한 장 버리지 않고 보관 중이다. 왜 메모지까지 보관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다.

 

“처음부터 이 양반이 대단한 사람인 줄 난 알고 있었으니까.”

 

이화여전 영문과 시절, 그녀는 주변 사람들한테 “이 양반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시인이다”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안목이 뛰어난 것인지, 염무웅 평론가는 “김수영 문학은 100주년을 맞으며 사후에 점점 더 최고조에 이른다. 생전 20년보다 사후 50년 동안 점점 더 치열하게 작동하는 ‘살아있는 김수영’으로서 한국 문학사의 ‘김수영 이후 시대’를 열었다”고 했다.

 

정지용 시인이 은사였던 김 여사는 프랑스 문학에 심취해 있었고, 소설을 쓰기도 했다. 훗날에는 타고난 천재적 감각으로 양장과 미술컬렉터, 화랑의 전시디렉터로서도 활약했던 신여성이었다. 특출난 미적 감각과 미모는 한국 문학사를 장식한 작가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유명한 일화도 남아있다.

 

그녀는 윤심덕이나 나혜석, 최승희처럼 예술가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예술적 능력은 뛰어났다. 김수영과 김현경 두 사람의 도합 200년 세월을 돌아보는 것은 실로 벅찬 일이다.

 

11년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땐 김수영 시인의 생전 서재가 고스란히 재현돼 있었다. 작고한 지 수 십년 세월이 지난 남편의 서재를 재현해 놓은 미망인의 기억력보다 그녀의 지극한 사랑과 섬세한 정성에 더 놀랐다.

 

이제 김수영 시인이 쓰던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던 그 때의 서재는 사라졌다. 지난 2013년 김수영 시인의 고향인 서울 도봉구에 김수영문학관이 세워질 당시 김 여사는 평생 목숨처럼 간직했던 김수영 서재와 유품 일부를 기꺼이 기증했다. ‘온 몸으로 자유를 갈망했던 시인’이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한 유작시 ‘풀’ 육필 원고를 비롯해 일기장, 탁자와 스탠드 등 귀중한 유품들이 기증목록에 들어갔다.

 

“내가 안줬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거기에 반도 전시되어 있지 않아요.”

 

김수영 시인의 육필시고전집(민음사, 이영준 엮음)에는 김현경 여사가 정서한 필사본들도 있다

 

당초 김수영문학관이 만들어져서 김수영에 대한 모든 것이 오롯이 전시되고 한국 문학사에 보전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미망인 입장에서는 만족할수 없었다고 했다. 애당초 건립 때 미망인과 긴밀히 협조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기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문학관 개관식에 미망인을 공식 초청하지도 않았고, 어디에도 ‘김현경 기증’이라는 글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지난 2020년에는 김수영 시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총 300여 점의 유품을 기증할수 있었다. 김 시인이 생전에 연세대학교에서 T.S.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특강할 때 작성했던 강의 노트, 육필원고, 일기장, 메모, 스크랩 사진 등 유품의 일부다. 연세대학교는 2021년,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유품 특별전을 개최했다. 당시 서승환 연대 총장은 “시를 통해 현대성을 치열하게 모색했던 김수영 시인을 통해 한국문학을 또 다른 차원에 올려놓고자 한다”고 했다.

 

김 여사는 “당시 총장이 윤동주기념관 옆 100년 넘은 건물에 김수영문학관을 만들기로 했으나 총장이 바뀌고 코로나19로 인해 이렇게 됐으니 그게 아쉬운 것”이라며 “메모지 한 장 버리지 않고 있으니 김수영의 유품은 막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명강의로 소문이 나면서 그 다음에 가니까  학생들이 복도까지 꽉 찼더래요. 구름떼처럼 모여드니 좀 더 넓은 강당으로, 중강당으로, 나중에는 대강당으로 강의실을 계속 넓혀갔죠. 게다가 연극 연출가도 되려고 했던 분이니 배우 기질도 대단했죠. 목소리부터 하나하나 다 연구를 하고 체크를 했어요. 명강의로 소문이 나면서 서울대에서도 강의를 했어요. 연세대에서는 기립박수를 쳤고, 옛날 서울대 아이들은 감동을 해서 끝났는데도 고개를 숙이고 있더라는 거에요.”

 

# “집 전체를 ‘김수영 자료실’로 만들고 싶어”

김여사는 그동안 많은 유품들이 빠져나갔음에도 전혀 횡하지 않게 집안을 아기자기하고 따뜻하게 꾸며 놓았다.

 

“우리 집 전체를 활용해서 김수영 자료실을 만들고 싶었어요.”

 

김 여사는 책꽂이 맨 윗줄에 꽂혀 있는 칸트 옆의 예이츠를 꺼냈다.

 

책을 펼쳐 보여주는데 마치 자로 잰 듯, 다리미로 다린 듯 한치도 비뚤어짐 없이 반듯하게 책을 접어 뭔가를 표시해 둔 곳들이 있었다.

 

김수영 시인이 생전에 탐독했던 예이츠 시집에는 중요한 곳을 반듯하게 접어 표시한

곳과 반듯한 글씨체로 메모한 메모지가 붙어있다.

 

“이 양반 이거 좀 봐. 이게 이 양반이 다 접고, 공부를 이렇게 했다고…. 메모해가면서, 정말 눈물 나요. 이것도 그이가 해놓은 거야. 자기가 생각해서 꼭 다시 주목해야 할 건 이렇게 한 거야.”

 

메모해서 붙여놓은 메모장의 글씨도 흐트러짐 없이 깨끗하고 반듯하게 쓰여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꼼꼼했던 생전의 김수영을 느낄 수 있는 자료다.

 

“그 양반은 밤낮으로 책을 놓지 않았어요. 진짜 공부벌레예요. 철학서부터 문학까지…. 그 사람은 (시를 쓸 때) 제대로 된 종이에다 쓰지 않고, 사용했던 종이나 봉투를 뒤집어서 거기에 쓰곤 했어요. 겸손한 태도죠. 그렇게 쓴 시를 나에게 2부씩 정서하게 해서 1부는 출판사로 보내고, 1부는 보관하는 거예요. 베껴 쓸 때는 책상 위에 원고지를 반듯하게 놓고 나를 불러서 정서하게 했어요. 시종일관 옆에 앉아서 지켜요. 띄어쓰기 하나만 잘못해도 처음부터 다시 쓰게 했지요.”

 

# 영화 같은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

김수영과 김현경 여사 사이에 있었던 길고 긴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긴 인터뷰 시간 중에 그녀는 세상에 알려졌던 영화 같은 그녀의 내밀한 사랑과 이별, 그리고 김수영과의 재회를 더 세밀하고 생생하게 증언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서는 한 세기를 맞이하는 그녀의 삶에서 당장 시급한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유품들을 어떻게 한국 문학사에 남길 것인가에 대한 공통의 과제를 인식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간절한 소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 박숙현 기자 / 사진: 김종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