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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크고 속 깊은 우리 시대를 위한 ‘사람 감싸기’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

 

용인신문 | “여기가 좋아//떼굴떼굴 뒹굴고 싶어라//뒹굴어/뒹굴어//저 비탈 아래 숯내 이르러/홀짝홀짝 울고 싶어라//뒷산 잔등에 올라”

 

고은 시인이 최근에 쓴 시 「세상의 시 578」이다. 집 뒷산에 올라 탄천 숯내를 내려다보며 즉흥적으로 터져 나온 듯한 시, 참 천진스럽다. 모든 것이 텅 비어가며 깊어가는 이 가을날 어린애로 돌아가고 있다. 탄천 깨끗한 물로 숯 검댕이 같이 더러워진 몸을 씻으면 혼이 자유스러워진다는 숯내 전설을 떠올리게 하며 기쁨과 슬픔, 어림과 늙음, 이승과 저승 등 우리네 삶을 재단하는 2분법을 단박에 뛰어넘는 시다. 세계 최고 시인으로 대우받다 나락으로 유폐된 시인의 심사도 보일듯하다.

 

며칠 전 고은 시인을 탄천 앞 식당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스페인에서 세계적인 문학상인 레테오상을 ‘국제적인 시의 모범’이란 이유로 받고 돌아왔고 또 위 시가 실린 신작 시집 『세상의 시』 4, 5권을 잇달아 펴내 후배 문인들이 마련한 축하 자리였다. 그런 모임은 극구 사양하면서도 92년 생애 전 체험에서 진심으로 우러난 말들을 들려줬다.

 

“이제 나, 자연의 인간인 나로 돌아온 것 같아 좋아. 사회에 얽매인 나를 내려놓으니 말이야”라며 털어놓은 한마디 한마디가 일상과 욕망에 끊임없이 쫓기는 우리네 삶에 청량수 같았다. “똥을 누고 그걸 한참 들여다보며 좋다, 좋다는 말이 터져 나와. 늙어갈수록 먹는 것보다 배설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지”라며 실감으로 격의 없이 털어놓은 말들이 참 재밌고 곱씹어볼 만해 ‘역시 우리 시대의 신화 고은’이란 탄성들이 절로 터져 나왔다.

 

스페인 시상식에 가서도 온몸의 시 낭송으로, 체험에서 진정으로 우러난 말들로 수많은 관중을 매료시켰다. 그래 현지 매스컴들은 “고은 시인의 목소리는 유럽 최고의 문화 공간을 리듬과 울림으로 가득 채우며, 청중을 언어 그 자체와 깊은 교감 속으로 끌어들이며 연달아 기립 박수를 치게 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면서 “시를 쓰고 낭송하는 게 아니라 고은 시인 자체가 시인 것 같다"고 찬탄했다.

 

그 자리에서 고은 시인은 ”시가 나를 구했다. 시가 없었다면 이미 나는 죽었을 것이다“고 밝혔다. 그렇다. 고은 시인은 시 자체다. 시가 그의 삶이다. 시 자체의 마음, 시혼으로 시를 쓰고 실천하고 살아왔다. 시가 그를 살게 하고 있으며 전생과 이승과 저승을 잇게 하고 있다.

 

고은 시인은 감격, 감동의 시인이다. 자신의 삶과 시대, 세상에 감격하며 살아오고 있다. 젊은 시절 6.25 동족상잔의 폐허에서의 허무도 감격으로 맞았다. 독재에 온몸으로 맞서는 울분과 투쟁 의지도 감격의 그런 시혼에서 진솔하게 터져 나왔다.

 

고은 시인의 수만 편에 이르는 시편들은 그런 감격의 언어로 써지고 있다. 그런 시편들은 머리 아플 것 하나 없이 가슴으로 직격해 들어온다. 그래서 세계의 독자들은 물론 우주 삼라만상의 속내까지 감동으로 소통하게 한다.

 

작품의 양은 물론 수준에서 고은 시인은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서 최대, 최고다. 그래 “우리 문학이 도달한 가장 높은 봉우리”, “천고千古의 역사가 그 한 몸에 모여있는 문화박물관”이란 동료 문인들의 평을 받아왔다. 미국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한국시 귀신이 들씌운 보살”이라며 고은 시인과 형제애를 나눠왔다.

 

“시인이 걸었던 시간은 그가 올랐던 저 눈 쌓인 히말라야보다 무겁다. 그가 건넌 인도양, 태평양보다 넓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관음觀音의 눈으로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사고무친의 황홀을 노래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가 걷는 아득한 저 너머 천지간엔 인독人毒이 배이고 배어 형체 없는 안개만 자욱하다.”

 

구순을 맞았을 때 후배 문인들이 헌정한 문집 『그리움 너머 그가 있네』 머리말 첫 대목이다. 고은 시인은 지금 인독이 배이고 배인 천지간에 형체도 없이 살고 있다. 세상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배이게 마련인 그 사람 독, 시대와 사회의 독을 풀어주고 좀 더 인간적인 세계에서 감동으로 통 크게 살아가게 해준 시인이 고은인데. 그런 시인을 내치고 있는 이 속 좁고 통 작은 우리 시대, 참 야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