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요 임금은 나라 다스리기를 자신보다 백성을 더 잘 위하고 더 훌륭한 성군을 찾고자 평생을 애쓴 인물이다. 그렇게 천하를 돌아 찾아내고자 애를 쓰니 당시 현자라 불리는 피의와 설결과 왕예 여타의 현자들이 입을 모아 한 사람을 천거하는데 허유라는 사람이다. 그의 사람됨은 의에 근거하여 방정하며, 나쁜 자리엔 앉지 않으며, 나쁜 음식은 먹지 않는 것으로 몸을 온전히 보전한 인물이다. 이처럼 천거와 소문을 들어 알게 된 요임금은 천하를 허유에게 선양하고자 찾아가 말하길,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 허유께서 임금이 되시면 천하는 절로 다스려 질 터이니 청컨대 천하를 맡아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이에 허유가 “나는 임금 자리든 천하든 다 쓸모없으니 요임금께서는 그만 돌아가시오.”라며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한다. 여씨춘추에 따르면 하루는 순임금께서 요임금은 어떻게 천하를 다스렸는가를 알고자 요임금의 스승이던 선권을 찾아가 물으니 선권은 요임금을 평하길 “천하를 다스림에 가르치지 않아도 백성이 그를 따랐으며, 권면하지 않아도 천하는 평화롭고 백성은 안정되어 크게 말하거나 억지로 함이 없었으니 백성으로부터 원망의 소리도 없었다.”고 했다. 이에 순임금은 크게 깨
[용인신문] 하루는 공자께서 제자 칠조개에게 벼슬에 오르라 하니 칠조개는 벼슬하기에는 아직도 배움이 부족하다며 한발 물러섰고, 또 공자 생전에 벼슬에 나선일이 없다. 이런 제자를 두고 공자께서는 자신을 잘 안다며 기뻐하셨다는 게 논어가 전하는 말이다. 공자께서 직접 제자를 콕 집어 벼슬을 하라고 한 예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공문에서 정치에 발군인 제자는 두어 서넛 되는데 민자건과 염구이다. 민자건은 정치력도 출중하지만, 특히 덕행에 뛰어난 인물이고 덕행은 모자란듯하나 정치력이 뛰어나기로는 염구다. 두 사람은 공자의 빼어난 제자로서 후대에 두고두고 비교되는 인물이다. 스승 공자의 명예를 실추시킨 인물을 들라면 염구를 드는데 그는 스승의 가르침보다는 자신의 출세와 명예를 세우는데 사활을 건 인물이다.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염구는 훌륭한 제자였다. 논어 곳곳에 그는 겸손했고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아는 그런 제자였다. 공자도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겨 믿고 노나라 실세 계씨에게 추천했는데 권력의 맛을 본 후 염구는 빠르게 진화되어갔다. 소극적이고 소심했으며 오로지 스승 공자만이 최고라며 열심히 따르던 그가 공자는 지는 해라는 사실을 알고는 누
[용인신문] 어느 시대에나 백성들은 큰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면 집을 나서 일터로 가고 해지면 돌아와 가족 모두가 온순 도순 저녁을 함께한 후 아무 걱정 없이 발 뻗고 잠잘 수 있는 것이다. 그 정도면 백성들은 여타의 것들에 대해 크게 욕심내는 일이 없다. 맹자는 이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백성들에게 일을 주되 위로는 부모 섬기는 데 충분하게 하며, 아래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데 충분하게 하라.” 이게 이천 삼백 년 전쯤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했던 말들이란다. 본래 백성들을 못살게 한 왕들은 대부분 비명횡사하던가 쫓겨나 밟히거나 한다. 훌륭한 정치란 백성들이 어려움을 몸으로 체감하지 않으면서 잘 먹고 잘사는 거다. 옛날 어느 시대에 격양가라는 노래가 있다.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를 까딱까딱 튕겨가며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나라 임금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 이렇게 잘 먹고 잘살다 보니까 도대체 임금이 누군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맹자는 말한다. “왕이 홀로 즐기고, 그들만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서도, 백성을 구호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그를 원망할 것이며, 왕의 그 즐거움은 길지 못
[용인신문] 진나라 시황제의 몰락과 함께 천하 통일굿 진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장본인 두 사람을 들라면 아마도 재상을 지낸 이사와 환관 조고를 비껴갈 순 없으리라. 이사는 한비와 더불어 순자 문하에서 공부한 명실상부한 법가다. 환관 조고 또한 법가다. 조고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는 환관만이 갖는 정보력(?)이라든가 환경과 처지가 아닌 통어옥법通於獄法이라는 법을 위반한 자는 지위고하를 무론하고 옥법獄法에 따라서 형벌을 가한다는, 듣기에 따라서는 그럴듯한 명분임에 분명한데 그럼에도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후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이 먼저 바르지 못하다는 데 있다. 저한테 유리하도록 법을 끌어다 쓴 악행 때문이다. 그것이 고사로 전해지는 것이 바로 저 유명한 ‘지록위마持鹿爲馬’의 고사이다. 세상은 이를 법비라 불렀다. 여기서 비는 도적놈이라는 의미가 있다. 쉽게 말해서 법을 아는 도적놈이라는 말이다. 본디 백성은 그냥 놔두면 알아서 잘들 살아간다. 그런데 꼭 저런 것들이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니 백성들의 삶이 더 꼬이게 되는 것이리라. 자신과 그를 둘러싼, 더러는 바르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잡아다 벌을 준다면 참 머쓱한 일임이 분명하리라. 사람은 바른길을 걷
[용인신문] 관중은 자신의 책 관자 목민 편에서 네 개의 줄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을 쓰고 있다. 하늘은 나라를 보살핌에 있어 그 나라 사방, 네 귀퉁이에 끈을 묶어 나라가 기울어지거나 엎어져 망하지 아니하게끔 끈의 균형을 유지토록 한다. 이를 전한 시기의 공자라 칭송받은 한나라 무제 때 춘추 박사를 지낸 동중서는 이 네 개의 줄을 일러 나라를 지탱하는 예의염치라 풀었다. 여기서 예라고 하는 줄 하나가 끊어지면 나라의 질서가 엉망일 것이고, 의라는 줄마저 끊어진다면 나라가 휘청할 것이고, 염이라는 줄마저 끊어진다면 나라가 기울 것이고, 더 나아가 치라는 줄마저 끊어진다면 그때는 나라가 망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멸滅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의염치는 물과 같아서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위에 있는 것은 오직 목민관이 전부라 했거늘 목민관이라 함은 분명 직위는 높은듯하나 하는 일에서는 백성들에게 봉직하는 공직자를 말함인데 이러한 목민관을 일러 모심청관이라 한다. 엄마의 마음으로 백성의 소리를 듣는 관리라는 말이다. 엄마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곧 목민관은 백성의 아픔을 들어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용인신문] 사마천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공자께서 존경하셨던 인물이 몇 분 계셨는데 주왕실 서고 책임자 노자, 위나라 대부 거백옥, 제나라 재상 안평중, 정나라 재상 자산. 노나라 가신 맹손작 <논어에는 맹공작으로 표기됨>이나 논어만 놓고 본다면 거백옥을 가장 존경한 듯하다. 거백옥의 인물됨은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을 했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벼슬에 물러나 자신의 몸을 돌아보는 것으로 수기와 치인의 균형을 이뤘던 인물이다. 한번은 공자께서 노나라에 계실 때 거백옥은 하인을 보내어 공자께 안부를 전한 일이 논어 헌문편 14-26문장에 기록되길 “거백옥이 공자께 하인을 보내니 공자께서 그와 더불어 자리하시면서 묻기를 대부 거백옥께서는 어찌 지내고 계시는가?” 이에 하인이 답한다. “저희 대부님께서는 사소한 잘못이라도 줄이려고 무척 애는 쓰시는 것 같은데 그게 잘 안되나 봅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당시 거백옥의 나이는 대략 졸수를 육박하는 나이라 했다. 그쯤 나이에 잘못한들 뭘 얼마나 하겠으며 줄여야 할 만큼의 사소한 잘못인들 있으랴. 유안이 쓴 회남자 원도훈 편에 따르면 거백옥은 50살이 되니 49년 동안 살아온 인생이 많은 부분 잘못됐음
[용인신문] 중국 진나라 사람 장화가 쓴 박물지 문적고 6편에 따르면 성인의 말씀을 경이라 하는데 본시 성인의 말씀은 먹물이 남아서 더 쓴 것도 아니고, 먹물이 모자라서 덜 씀도 아닌 그야말로 꼭 필요한 말씀만 쓰신지라. 무릇 일반 범부가 그 말씀을 이해는 고사하고 읽기에도 어려운지라, 이에 밝으신 현자가 나셔서 그 성인의 말씀을 풀어주셨는데 이를 전이라 한다. 그리하여 후학들은 이를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며 줄여서 경전이라 불렀다. 성인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리 특별할 게 없는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 곧 그것이다. 그중 하나가 관자일립이라 불리는 신년 첩일 것이다. 관자는 논어에도 몇 번씩이나 언급되는 인물로 제나라 환공을 도와 최초로 춘추오패를 이룬 인물이요, 변방의 척박한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제나라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만든 장본인 이기도 하다. 관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압축하여 말한다면 “백성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하라.”가 전부다. 여기에 대한 실천방안으로 백성들의 삶에 백년지대계를 세우는데 그의 말을 쉽게 풀어쓰면 “일 년을 살기 위한 계획으로 가장 좋은 것은 곡식을 심는 것이 으뜸이고, 십 년을 살기 위한 계획으로 가장 좋은 것은 나무를 심는 것이며, 백
[용인신문] 하루는 제자 원헌이 부끄러움에 대해 물으니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나라에 도가 있음에도 딱히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아먹는 것이 부끄러움이요. 나라에 도가 없음에도 능히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녹봉만 받아먹는 것 이 또한 부끄러움이니라. 이를 좀 더 완곡히 풀어놓은 이가 맹자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일정량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 맹자보다 앞선 옛글은 이를 후안무치라하여 얼굴이 두꺼워서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의미이다. 맹자표현에 의하면 세상에는 두 개의 무리가 있다는데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을 행하는 순임금의 무리들과 같은 이들이 있을 것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찾는 도척의 무리와 같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후학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주석을 단다. 저들이 저리도 순임금의 무리처럼 선을 행하든 도척의 무리처럼 이익을 찾든 거기에는 일정량 섬겨야 할 의무가 있고 지켜야 할 본분이 있다는 것이다. 섬기는 것 중에 가장 큰 일은 어버이 섬기는 일이요, 지키는 것 중에 가장 큰 일은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모님 봉양을 잘해드리는 것이 섬김의 근본이고, 자
[용인신문] 공자의 제자 자공이 정치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는 세 가지로 답한다.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며, 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며, 이를 기반으로 백성으로부터 신뢰를 받아내는 것이라 했다. 정치를 일러 군치덕 민유득이라 한다. 군주는 덕으로 정치를 베풀고, 백성은 실질적 이득을 얻음이다는 말이다. 정치란 것은 어려울 것도 그렇다고 복잡할 것도 없다. 그저 덕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고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백성들이 원하는 그것을 안 해주려니 나라가 시끄러운 거다.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인 한유의 말 중에 평평하지 못하고 기울면 운다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해서 백성들은 배고프면 신음을 낼 수밖에 없다. 허기가 졌거늘 어찌 웃음이 나오겠는가. 노나라 군주 애공은 가족과 측근들에게만 훌륭한 군주였다. 그러니 백성들은 늘 춥고 배고프니 나라가 시끄러울 수밖에…. 하루는 공자께 묻는다. 어떻게 해야 백성들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는 이렇게 답한다. 오로지 백성만 위하는 바른 사람을 쓰고, 오로지 제한 몸 위하는 굽은 사람을 버려두면 됩니다. 고래로 덕치를 베풀면 민심을 얻는다고 했다. 그래서 정치란 수기 이후에 치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용인신문] 19세에 이른 공자는 송나라 여인 올관씨를 아내로 맞아 아들 공리를 낳고, 이십 삼사 세쯤에 이르러 무슨 연유에선지는 모르나 아내와 헤어진다. 여기서 나온 성어가 ‘공자 출처’, 곧 ‘공자는 아내를 내보냈다.’라는 글자이다. 한나라 문제 때 박사를 지낸 한영이 쓴 한시외전에 따르면 맹자는 ‘휴처’ 했다고 기록한다. 출처는 ‘아내를 내쫓았다’라는 의미에 가깝고, 휴처는 ‘아내의 직분을 그만두게 한다.’에 가깝다 하겠다. 어쨌거나 성인들의 아내 관은 일반 범부들의 생각과는 분명 결이 다르긴 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나 공자의 아내에 관한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공자께서 14년간 철환주유 중 위나라에 계실 무렵 68세쯤에 이른 어느 날 출처한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아들 공리가 죽는다. 서너 달 후 제자 염백우가 문둥병에 걸려 스승 공자께서 병문안을 가신다. 염백우는 병이 전염될 수 있다며 방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공자께서는 창문 너머로 제자를 향해 말한다. ‘이리도 훌륭한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라며 탄식을 한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기독교 경전에도 기록되어있다. 기독교 경전 누가복음 5장 12~
[용인신문] 갈릴리 호수 가의 작은 어촌 가버나움에 사는 어부 베드로에게 청년 예수는 먼저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다고 성서는 기록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제자 베드로는 스승 예수보다 장장 10년 이상의 연배였다. 가정을 가진 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십계명의 율법이 버젓이 살아있는 유대 사회에서 모셔야 할 부모까지 남겨두고 나이 차를 개의치 않고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당시 예수에 대한 평가는 싸늘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세리 마태의 기록이라 전하는 마태복음 11:19 절이나 의사 누가의 기록이라 전하는 누가복음 7:34 절에 따르면 참 민망하기까지 하다. 완곡히 풀어쓴다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먹는 것만 밝히고, 술만 퍼 마셔대는 주정뱅이쯤으로 인식했다. 기껏 친구라야 세리와 죄인들이 전부인 그저 그런 정도의 인물이다. 예수의 막내 제자 요한의 기록은 더 가관이다. 요한복음 7:15 절의 기록은 이렇다. “유대인들이 기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용인신문] 제나라 선왕이 맹자께 물었다. “신하가 임금을 치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까?” 이에 맹자는 답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있기도 하지요.” 그러자 선왕은 놀라서 되묻는다. “신하가 임금을 죽인다는 게 될 법이나 한 소리입니까?” 맹자가 답하기를 “인을 해치는 사람을 도적이라 하고, 의로움을 해치는 사람은 잔악한 자라 하고, 세상은 그런 자들을 그냥 필부라고 합니다. 저는 필부에 불과한 주왕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주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맹자다운 우문에 대한 현답이 아닐 수 없다. 맹자의 일화를 살펴보면 공자를 변호하고 오로지 공자만 존경한 인물 한 사람을 들라면 맹자가 유일하다. 맹자 양혜왕하편에 따르면 ‘탕방걸 무왕벌주’라는 고사가 나온다. 탕이 걸왕을 추방했고, 무가 주왕을 벌주었다는 말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 할 때는 신하였던 자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그 임금을 벌 주기도 한다. 맹자 이루장구상7-9문장에서는 걸왕과 주왕이 권좌에서 쫓겨난 장면을 꽤 완곡한 문체로 기록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