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별 이야기 (계 癸 - 상상의 날개를 가진 자) 계수(癸水)는 모든 것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명수 같은 물이 되어 생(生)을 만드는 힘이 있다. 물론 태어남은 축복이 되고 다양한 존재의 변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것은 태어남의 고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우연을 당연함으로 시작하는 계수는 안개와 구름이 되어, 빗물처럼 내려와 맑은 시냇물과 옹달샘도 되지만, 사나운 눈꽃과 얼음도 된다. 계수(癸水)는 다변(多變)하다. 결코 한가지로 정의내릴 수가 없는 어떤 성질이 된다. 물과 불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성질이 있다. 특히 계수(癸水)와 정화(丁 火)는 그것을 재촉한다. 정화는 죽음을 만들고 계수는 생명을 만든다. 사실 죽음보다 생명이 더 잔인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살아 있는 것들이 언제나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면 계수(癸水)의 성질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창의성과 창조성은 변혁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거기엔 새로움의 기쁨과 놀라움도 있지만, 낯선 느낌과 섬직한 공포도 함께 있다. 그래서 계수(癸水)에겐 기쁨과 공포가 함께 한다. 씨앗인 신금(辛金)에 계수(癸수)의 물을 주면 매끄럽
임(壬)-머물고 간직하는 자 임수(壬水)는 변함없이 항상 있는 물을 뜻한다. 바다나 호수와 같다고 봐도 되지만, 그렇게 커다란 성질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고정된 실체를 갖고자 하는 성질이 임수(壬水)가 된다. 임수는 마무리고 완성이며 영원성을 의미한다. 지극한 어둠이고, 고요함이며 죽음의 편안함을 뜻한다. 그래서 임수(壬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뭐든 잡아먹는다. 임수에게 두려움은 없다. 단지 번잡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임수(壬水)는 탁수(濁水)이다. 검은색이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는 어둠과 같다. 그래서 다투지 않는다. 온갖 잡 생물들이 사는 바다나 강처럼 맑지 않아서 모두가 임수 안에 숨는다. 서로 다투지 않게 보호하며, 서로 자기 자리를 찾게 도와주고 서로 다름이 있음을 인정해준다. 하지만 그 성질은 차갑기 때문에 냉엄하다. 자기자리를 벗어난 것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섞이는 것을 싫어하며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하며 평화롭게 공존하기만을 원한다. 혼탁한 성질과 고정의 성질이 함께 양립하기 때문에 임수(壬水)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
열 개의 별 이야기 (신 辛 - 고귀함을 지키는 자) 신금(辛金)처럼 무척이나 매력적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을 가진 천간은 없을 듯싶다. 한자의 풀이도 맵다, 고생하다, 살상(殺傷)하다는 뜻이 있다. 그렇듯 자기 사주에 신금(辛金)이 있다면, 고집이 세지고 변화하거나 타협하는 것을 못하는 성질이 생긴다. 그 이유는 신금(辛金)이 씨앗의 의미를 지닌 기운이기 때문이다. 경금(庚金)이 과육(果肉)처럼 보기 좋은 열매의 껍질을 이야기한다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씨가 신금이다. 신금(辛金)이란 씨앗은 자신을 보호한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고귀한 정보를 함부로 바꾸거나 훼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만을 좋아하게 되고, 변화를 요구하거나 성장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 한마디로 귀족처럼 살고자 하는 성향이 생기게 된다. 밤이나 잣, 아몬드처럼 단단한 껍질을 가진 것들을 신금(辛金)이라고 한다. 우리가 먹는 쌀이나 콩도 그렇다. 그것들은 단단하며 잘 변하지 않고 계절의 변화를 버티며 다시 땅에 심어질 때까지 고유의 형태와 정보를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신금은 생명에게 있어서는 먹을 것이 된다. 특히 짐승은 이런 신금을
열 개의 별 이야기 (기 己 - 개인의 세상을 수호하는 자) 기토(己土)는 개인의 시간을 말한다. 한자 자체의 뜻도 자기, 몸, 자아를 말한다. 무토(戊土)가 공유지라면, 기토(己土)는 사유지다. 그래서 기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잘 챙기는 살림꾼이 된다. 보통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을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대지 같은 무토(戊土)의 말이 아니라 기토(己土)의 언어가 된다. 기토는 남들이 이기적이지 않아야 자신이 더 많이 챙길 수 있을 테니까 남들을 이기적이라고 하는 비난을 즐겨하게 된다. 또한 기토에겐 비밀이 많다.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누리고 싶은 꿈도 크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신의 꿈을 지키고 개성을 발휘하고자하는 성질도 강하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사회보다는 개개인을 본다. 타인의 마음을 잘 읽을 줄 알며,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해타산이 어떻게 되는지를 쉽게 알아챈다. 그래서 기토는 영리하다. 손해 볼 짓을 잘 하질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기쁨이나 즐거움이 우선하고 그 다음 세상을 생각한다. 자기 보호본능이 마치 자식을 보호하는 어머니 같아서 스스로 어떤 역경이든 잘 대처해나가고, 타인과의 경계를 분명하게
열 개의 별 이야기 (정丁 - 의심과 개혁의 불꽃을 가진 자) 정화(丁火)는 지상의 불이며, 인간이 세상을 변화시킬 지식이 된다. 그런 불을 인간에게 선물로 준 티탄족인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게 매일 새로 돋아난 간을 파 먹히는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만물을 키우는 제우스가 병화(丙火)라면, 만물을 죽여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 프로메테우스의 정화(丁火)다. 정화의 삶은 아프다. 어두운 곳을 볼 수 있기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속성이 있다. 또한 불의 힘은 모든 것을 변형시키고 바꾸고 새롭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불이 있어야 쇠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쇠는 자연을 바꿀 힘과 권력과 풍요를 낳지만 그 대가는 죽임으로 탄생하기에 아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화(丁火)를 멸화지기(滅火至氣)라고 칭한다. 정화(丁火)는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같다. 어둠을 비추는 눈이며, 잘못을 찾아내고 변화를 도모하는 개혁의 정신이 된다. 그래서 정화에는 반항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정하지 않는다. 노력하고 머리 굴린 만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고와 노동이 존재하는 고통의 길을 서슴없이 도전한다. 따라서 자신만을 믿는다. 자신이 본 것
오광탁- 열 개의 별 이야기 (무 戊 - 사람의 세상을 수호하는 자) 무토(戊土)는 외부의 시간을 말한다. 밖에서 노는 시간이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된다. 무토(戊土)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현관문 같다. 따라서 말이 많다. 물론 사람들이 찾아 올 때만 그렇다. 무토(戊土)의 땅은 산과 같이 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거둔다. 그것은 사람들을 살기 좋은 마을에서 살도록 해주려는 수호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토(戊土)는 자기에게 의지한 사람들을 버리거나 내치지 않는다. 물론 산적과 뜨내기들은 예외다. 땅은 무엇인가를 간직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땅 속엔 오만 것들이 다 들어있다. 땅에서 물이 나오고, 땅에서 나무와 풀들이 나오며, 귀금속이 나온다. 인간들은 예전부터 그런 땅을 가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가지면 뭐할까? 일구지 않고 파내지 않으면, 땅은 그냥 땅일 뿐인데 말이다. 건드려지지 않는 무토는 조용하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만을 지킨다. 그래서 그들에겐 무서운 것이 없다. 뭐든 자신의 몸과 숨겨진 지혜로 막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난 한때 무토를 막무가내라고 칭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일단 부딪치고 뭐가 나올지 나중에 안다. 무토의 성격은 그들
열 개의 별 이야기-병丙 - 희망과 믿음의 지배자 병화(丙火)는 태양이고 빛이다. 그에겐 그림자가 없다. 솔직하고 밝고 아름다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은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일이다. 텅 빈 우주 공간의 태양은 고고하고 외롭다. 하지만 지구라는 작은 땅을 만나면 이야긴 달라진다. 땅의 생명들이 병화의 에너지로 태어나고 자라고 꽃을 피운다. 만물은 움직이는 초록색으로 변한다. 아이의 변화와 성장이 부모의 기쁨인 것처럼 병화의 행복은 키움에 있다. 병화를 만나면 언제나 즐겁다. 타인의 웃음을 사랑하고 타인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병화의 언어는 희망의 말이며 긍정의 언어다. 그래서 그는 마땅히 칭송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에겐 그늘이 없다. 그늘의 휴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햇볕이 짙으면 그림자도 짙어지고 희망이 높으면 절망도 크다. 강한 믿음은 강한 두려움을 낳는다. 그래서 병화는 무섭다. 그에게 안 되는 것은 없다. 꿈꾸고 희망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 어느 것이든 안 될 리가 없다. 변화의 역동을 아는 그는 너무도 성실하다. 영원한 불가능을 인정하지 못한다. 좌절과 절망은 병화의 말이 될 수가 없다. 지루한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처럼 포기를 모르는 그는 주의
을목(乙木)은 태양을 향한다. 해바라기 같은 그들의 눈빛은 아이와 닮아 있다. 어쩌라고, 세상엔 여리고 여린 생명들이 그토록 많은지 모르겠다. 그들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그들이 웃으면 나도 즐겁다. 정말 너무나 무서운 그들 앞에 결국 난 미소만 짓게 된다. 봄에 태어나는 푸릇한 새싹이며, 여린 꽃잎을 드러낸 수줍은 꽃이고, 뛰노는 아이들이 을목(乙木)이 된다. 하지만 난 그런 아이들이 싫다. 아직 내가 어른이 되지 못해서 그들을 돌볼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을목(乙木)은 언제나 친절한 보호를 필요로 한다. 따스한 미소로 대하고 포근하게 안아주며, 잘 못된 곳으로 뻗어가지 않게 가지치기도 잘 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무럭무럭 자라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예쁜 꽃에서 훌륭한 열매를 맺고 반듯한 어른이 되어 그들이 받은 사랑을 세상에 다시 돌려준다. 그래서 을목(乙木)은 힘없는 백성이며 서민과도 같다. 충성스런 신하이며, 배신할 줄 모르는 착한아이와 같지만, 사랑이 없는 곳에선 고개를 돌린다. 엄마를 잃고 사랑에 버림받은 을목(乙木)은 운다. 여린 가슴으로 밤새도록 운다. 민초와도 같은 을목(乙木)은 김수영의 시에 나오는 풀과 같다. 그렇게
오광탁의 사주명리 Ⅱ 열 개의 별 이야기 밤과 낮, 그리고 사계절의 이야기만큼 지극히 일상적이고 따분한 이야기는 없을 듯싶다. 뭐 항상 그러니까 말이다. 낮이 지나가면 밤이 오고, 봄이 지나가면 여름이 온다. 그렇게 너무도 뻔한 시간들을 맞으며 살아가는 게 인생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엔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기쁨과 우울, 행복과 고통, 꿈과 절망이 쉬지 않는 바람처럼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과연 무엇이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리고 또한 사람들은 각기 다른 계절을 사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따스하고 어떤 사람은 차갑게 사는지 이상하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똑 같은 하루란 없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사람도 없다. 하지만 별 관심 없다면, 그저 좋다 아니면 싫다는 느낌뿐이겠지만, 정말 세상은 보면 볼수록 알록달록한 색깔을 지닌 무지개가 있어서 그것을 봐주길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알지 못하면 보이지도 않는다. 아무런 성찰적인 노력이 없다면, 늘 지겨운 것만 보이는 것이 세상이다. 물론 별 노력안하고 단순한 삶을 변함없이 즐기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삶이란 고통만큼 혹은 노력한 만큼 아름다워진다. 결국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
사주명리로 보는 을미년- 청양의 해 욕심내지 말고 성실히 내 것을 먹고 기꺼이 양보하자 오광탁 (사주문화심리연구가) ■성실하고 꾸준함이 최고인 해 을미년과 갑오년은 세트가 된다. 갑오년에 세웠던 개혁의 뜻이 을미년에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갑오년엔 많은 것들이 엎어지고 뒤집어지며 새롭게 바뀌어가는 해여서 다들 정신없이 살았던 한해였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렇게 우연찮게 발견한 새롭게 세운 뜻을 을미년엔 확실하게 다지고 구축해가야 한다. 갑오의 말이 새로운 시작과 터를 발견한 것이라면, 을미의 양은 그 터전에서 살을 찌워 가는 것이니까 그저 성실하고 꾸준하게 먹고 자고 하면서 반복적으로 행하기만 하면 된다. 별 생각 없이 익혀가는 반복된 훈련은 새롭게 뭔가를 하는 것보다 최고의 성과와 힘을 갖추게 해준다. 익히고 또 익힐 것. 지겹지만 참고 견딜 것. 그렇게 을미년을 보내다 보면, 내년 병신년엔 열매가 열린다. 그러니 올해는 과정의 해이다. 확장과 성장이 이루어지지만, 결과에 대한 기대는 조금 더 늦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키운 만큼 더 좋은 열매가 생긴다는 것은 불 보듯 환하니까 잔머리 굴릴 생각 따윈 안하는 게 좋다. 괜히 뭔가를 또 새롭게 발견해서
사주명리로 본 세상이야기 사주상담을 청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언제 잘되는지 언제 성공하는지를 물으러 온다. 성공하는 시기가 분명히 사주 상에도 있긴 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엉뚱한 길을 가고 있다면 운이 아무리 좋아도 실패하게 되어있다. 한마디로 콩 심은 데는 콩만 나지 팥은 안 생긴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길보다는 엉뚱한 돈 되는 길로 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현 시대는 돈의 시대이고 시장경제의 원리로 사회가 돌아간다. 그래서 부자가 되는 것을 꿈꾸는데, 그렇다고 무조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모두가 부자 될 수는 없다고 사주명리는 말한다. 부자는 하늘이 내려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부자가 될 수 없는 대신 그릇의 쓰임새가 명예를 얻거나 인품을 얻거나 자기만의 기술을 얻는 데 있고 그것으로 만족한 삶이 가능하다고 사주는 이야기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담은 언제나 돈 많이 버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집중되어 있어서 언제쯤 돈 때문에 힘든 삶이 끝나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장사해서 돈 많이 버는 것도, 선생님이 되는 것도, 정치가가 되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의사나
사람들은 팔자소관이라며 이미 인생을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특히 자신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도덕에 치여서 사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잘되고 못되고는 하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까지 하늘의 뜻일 리는 없다. 어떻게 불행하게 사는 게 하늘이 준 운명이며 팔자소관이 될까? 만일 한 겨울 혹한의 삶을 살아가는 운명이 있다면 힘들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조건 불행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너무 이상한 것이 된다.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들이 다 불행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살아가기 힘든 환경이 곧 불행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편안하고 여유롭고 게으르게 살아도 되는 삶을 바라는 마음이 사람에겐 항상 있다. 그것은 바쁘거나 귀찮고 위험한 삶은 나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통념이긴 하지만 인간은 양식장에서 키우는 물고기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말이다. 사람에겐 개성이 있다. 누구나 자기만이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 자신에게 어울리는 환경을 찾고 싶어 한다. 편안한 환경을 지루하고 권태롭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