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의 세설 인물이 그렇게도 없단 말인가 혜제의 현손 경제의 열한 번째 아들 한무제는 통치기간 내내 백성들로부터 무식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까봐 전전긍긍하며 나는 무식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평생 고전을 읽었는데 논어다. 군주가 가장 두려운 것은 백성이다. 백성이 등을 돌리면 군주로서는 아웃이다. 그냥 권력만 있을 뿐이고, 그 권력이 두려워 복종만 있을 뿐이다. 위징대왈(魏徵對曰)위징이 말한다. 신우문고어운(臣又聞古語云) 신이 또한 듣기에 옛말에 이르 길/ 군주야인수야(君舟也人水也) 군주는배요 백성은 물이다/ 수능재주(水能載舟) 물은 능히 배를 띠우기도 하지만/ 역능복주(亦能覆舟) 또한 능히 엎기도 한다/ 貞觀政要1券2篇政體篇 한무제가 논어를 읽긴 읽는데 주석은 읽지 않고 원문만 읽는다는 소문이 백성에게까지 났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주석을 읽는다는 것이다. 주석을 내려놓는 순간 그것은 자기 맘대로 읽겠다는 꼴이다. 당시의 백성들은 논어맹자에 박식했다. 이유는 한무제 선대의 협서율 정책으로 인해 각 가정마다 논어맹자 책을 소장하면 죽이는 상황이어서 백성들은 책 암기 후 없앤다. 한무제 당시 그나마 남은 논어 책이 노(魯)논어가 있고 제(齊)논어가 있
저런 것도 장관이라고…. 세자 광(光)은 부친 영공(靈公)이 애첩 중자(仲子) 소생의 이복동생 아(牙)를 세자로 책봉하자 졸지에 폐 세자가 된다. 이에 사부인 최저가 영공을 죽이고 폐 세자 된 영공의 아들 광을 제위에 앉힌다. 그가 제나라 22대 군주 제(齊)장공(莊公). 이자는 혼음무도한자다. 제장공은 최저의 후처 당강(棠姜)을 겁탈 후 6년의 세월을 교정(交情)한다. 장공이 위에 오른 지 6년째(기원전 546) 되는 해 5월, 견디다 못한 최저는 장공을 죽인다. 그리고 1년 뒤 기원전 547년 1차 사초가 교정을 거쳐 정사(正史)로 기록되는 날 사관 백에게 제장공이 학질로 죽었다고 쓰라고 했다. 사관 백(伯)은 “우상 최저가 제장공을 죽였다(午月乙亥日崔杼弑莊公)”고 썼다. 최저는 그를 죽인다. 형의 직을 승계한 동생 사관 중(仲) 또한 “최저가 그 임금을 죽였다(崔杼弑莊公)”고 썼다. 최저는 그도 죽인다. 형의 직을 승계한 막내 사관 계(季)도 “최저가 그 임금을 죽였다(崔杼弑莊公)”고 썼다. 이쯤 되자 천하의 최저도 어쩌지 못했다. 사관의 권력이 정승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60년 전. 기원전 60
7세 아이가 쓰는 입춘첩(立春帖) 입춘(立春)은 24절기의 맏형인 봄의 시작을 의미한다. 한해의 행복과 건강을 비는 마음을 유일하게 문자로 명토박아 써서 대문짝(문비門扉)에 붙여 다음해까지 떨어지지 않게 하여 십년을 그 위에 붙이고 또 붙인다면 귀신도 감동해서 복을 안 줄 수 없다는 속설이 있다. 이를 입춘첩(立春帖)이라하는데 입춘첩은 반드시 마을이나 집안의 7세 된 아이가 당일 아침 7시에 써야 효험이 있다한다. 입춘대길 건양다경(建陽多慶). 봄에 들어서니 크게 길하고 하늘의 기운으로 땅에 경사가 많다. 입춘첩으로서는 최고의 명문으로 치는데 이유는 측성으로 시작해서 측성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높은음 즉 높은 기운이 사기(邪氣)를 누른다는 말이다. 물론 마당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온다는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라는 오언구도 있다. 똥구멍이 찢어지려해도 심줄이 걸려서 못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런 글귀까지 써서 붙여야 할 만큼의 절박했던 벼랑 끝 삶이었으랴. 문제는 7세 된 아이가 붓글씨로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일 정도면 거필삼년득체미(擧筆三年得逮味 붓을 든 지 삼년이라야 붓 맛을 알
올 한해는 제발 공복(公僕)이 되라 전해라 혼용무도라는 말은 자전(字典)에 나와 있는 고사가 아니다. 후대인들이 도저히 저런 인간? 에게 딱 들어맞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없이 만들어 낸 성어가 혼용무도다. 욕도 이보다 더한 욕은 없으리라. 이런 말을 들으면 방법은 두 가지다. 부끄러워서 도망을 가던가, 스스로 사표를 쓰던가. 명나라 충신 방효유(方孝孺)는 말한다. 흥하는 군주는 남이 말을 해주지 않을까 걱정하고, 망하는 군주는 남이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한다.(將興之主 惟恐人之無言 將亡之主 惟恐人之有言) 그렇거늘 이런 말을 듣고도 나는 아니겠거니 하고 또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있는 걸보면 저런 인간들을 믿고 나라를 맡겼으니 국민들만 죽어나는 것은 명약관화한일일터. 그런 주제들이 뭐한게 있다고 또 무슨 행사 때만 되면 수행원들 데리고 와서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는 참 눈꼴시럽기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국민이 뼛골 쑤시게 벌어 내는 세금으로 먹고살면서 되려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 물론 본인들이야 국민을 위한다고들 목에 핏대 올리며 말 하지만…. 나는 충고했지만 듣는 사람이 협박으로 들었다면 그건 협박인 것이다. 혼용(昏庸)이란 말은 사전적 의미로 재능
현량(賢良)은 누구고 그놈이 그놈은 또 뭐랴. 민(民)은 노예다. 본래 민(民)은 간(艮)에서 시작되는데 간은 본다는 의미인 안(眼)의 출발이다. 이것이 노예를 나타내는 민(民)을 낳게 된 데는 전쟁의 공이 크다. 전쟁에 패한 쪽은 죽거나 노예가 되는데 그냥 부려 먹자니 혹시라도 이놈들이 덤비면 어쩌나해서 눈알을 뽑은 후 부려먹는다. 간(艮)에서 획을 한자 뺀 것이 민(民)이 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자국인을 일러 민(民)이라 하지 않고 백성(百姓)이라불렀다. 백성과 노예인 민을 분명하게 구분했던 것이다. 이를 모르지 않는 공자께서도 논어에서 인(人)과 민(民)에 대한 교육을 다르게 하고 있다. 노예의 특징은 인간이면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은 인정되지 않는 것. 논어학이편 5문장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 사민이시(使民以時)라는 문장에서 인과 민은 다르다. 13세에 황제에 올라 53년 간 통치한 한 무제 때는 정현(鄭玄)의 주(注)가 있었고 남송 때는 주자(朱子)의 주(注)가 있었고, 오늘날에는 한송(寒松)의 부안설(附按說)이 있는데 논어집주(論語集註) 부안설(附按說) 천편(天篇) 47쪽 안설(按說) 하단에서 “사람을 사랑하며 일꾼 부리기를 때에 맞게 하라”에서
장안을 후끈 달군 혼외정사 돈으로만 환전이 가능한 혼외정사. 세상은 이를 일러 불륜이라 불렀다. 더 이상 성(性)은 성(聖)스러운 것도 해방도 아닌 상업이다. 대학가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베스트 구호가 있다. 당당하게 ‘모텔’ 들어가서 쿨 하게 나온다. 한때 우리의 앞 세대에는 손목만 잡혀도 순결을 잃었다며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물속으로 뛰어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혼이 무슨 벼슬인 냥 떠버리고 다니는 시대가 됐다. 아직도 그 여자하고 사냐? 라며 ‘이혼’못하면 마치 무슨 바보 취급당하는 데야 무슨 할 말이 더 있으랴. 조선시대 선비가 아닌 평민들은 아내를 버릴 때 사정파의(事情罷意), 합의이혼이라 하여 놋쇠로 만든 칼로 할급휴서(割給休書)를 하는데 남자는 아내로부터 옷 앞 고름 섶 자른 것을 받고, 남편은 자신의 옷깃을 잘라서 준다. 이를 증표삼아 그 즉시로 재가할 수 있다. 이른바 “립고타인(立顧他人)돌아서면 남이다”라는 말의 출처다. 그러나 선비는 그렇지 않다. 숙종실록 권40(숙종 30년 9월 신유일)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법이 없어 아내가 사나워도 헤어질 수 없다”라고 명토 박는다. 그렇다 배처당
독재자이며 폭군의 후손인 헤롯대왕 동방박사 오지랖의 결과는 참혹했다. 헤롯대왕 면전에서 “유대人 왕 나신이가 어디계시뇨? 우리가 경배하러 왔노라.”라는 이 한마디가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올 줄은 동방박사 그들도 미처 몰랐으리라. 신약성경에는 헤롯 왕이란 이름이 45번 나오는데 동방박사가 만난 헤롯왕은 10명의 아내와 15명의 자녀와 기록되지 않는 검은 아이 17명의 자녀를 둔, 평생을 출신성분 콤플렉스에 분노한 70세의 늙고 병든 헤롯대왕이다. 헤롯대왕은 메시아, 예수 따위는 관심 없다. 동방박사가 말한 유대人의 왕이라는 그 유대 人. 그놈의 유대人 혈통에 헤롯대왕은 미치고 환장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독재자요, 폭군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사람으로 유대人이 아닌 이방인이다. 유대사회에서 헤롯의 위치는 비록 대왕(大王)일지라도 “유대인도 아닌 주제에 유대의 왕이라니 지 애비가 로마에 사바사바해서 왕 된 주제에.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영화 친구)” 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헤롯대왕 알기를 권력만 두려워할 뿐, 속으론 개똥 만큼도 여기지 않는다. 전에 으리으리한 부자가 환갑 잔치를 할 때 평생을 계(紒)하고 갓쓴 선비에게 칠언배율 한시로 축시를 부
10년의 명불허전 남자의 인생에는 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가슴을 에이는 반전이 있어야 한다. 육조시대 진(晋)나라 좌사(左思)는 자(字)가 태충(太衝)으로 공부도 음악도 뭣하나 빼어난 데가 없다. 당시 하급관리인 아버지 ‘좌희’의 성화로 시를 조금은 쓰게 된 후 1년여에 걸쳐 완성했다는 부가 있는데 제나라 도읍이자 제 고향인 임치를 운문으로 노래한 제도 부제도부(齊都賦)다. 당시 좌사의 부를 접한 묵객들은 “곰도 궁구르는 재주가 있더라.”며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말이 오갔다. 못내 서운했던 좌사는 나지막한 소리로 분노를 대신한다. “쳇, 글쟁이가 글로 말하면 됐지(寧書癡唯言書耳)” 그러고서 10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 삼도의 부삼도부(三都賦)다. 좌사가 삼도의 부를 쓴다는 말을 낙양에 와서 벼슬을 살고 있는 육기가 듣는다. 육기(陸機)는 삼국시대 오(吳)나라 승상(丞相) 육손(陸遜) 손자이며, 군사령관 육항(陸抗)의 넷째 아들이다. 동생 육운(陸雲)과 함께 이륙(二陸)으로 불렸고, 고영(顧榮)과 더불어 낙양삼준(洛陽三俊)으로 태강지영(太康之英)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런 그였기에 일찍이 그도 삼도의 부를 구상 중에 좌사의 삼도 부 소식을 들은 것이다. 고향에
공자절사 삼불급(孔子絶四 三不及) 공자절사(孔子絶四)라 했다. 네 가지를 끊었다는 말인데 무의(毋意)-자기 맘대로 함이 없고, 무필(毋必)-기어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고, 무고(毋固)-고집을 부리는 일이 없고, 무아(毋我) 꼭 내가 해야만 된다는 욕심이 없음이다. 장자(莊子)는 장자 6권 대종사 편(大宗師篇)에서 이를 심재좌망(心齋坐忘)이라 주석하는데, 심재좌망은 3세기경 중국 위진 시대 장자 주석으로 이름을 떨친 곽상(郭象)에 의해 현토되기를 심재는 몸과 마음의 깨끗함이요, 좌망은 무심의 마음이라 했다. 굳이 선후를 따진다면 아마도 좌망이 있은 후 심재 일 것이다. 좌망은 그냥 앉아서 멍한 상태 즉 멍 때리는 상태쯤으로 보면 된다. 흔히 엄마들이 자녀가 공부하다가 멍하니 있으면 왜 멍 때리고 있느냐며 이마를 콕 쥐어박기 일쑤지만 요즘엔 핸드폰이 생겨서 멍 때리는 시간조차도 빼앗겨버렸다. 좌망이 되어야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 다듬는 심재(心齋)가 형성되는데, 심재가 형성되면 이는 막역어심(莫逆於心)이라 하여 거칠 것이 없는 마음이 될 수 있다. 공자삼불급(孔子三不及)이라하여 공자는 일생에 마음 속에 세 가지를 미치지 못한다했는데 우(憂)와 구(懼)와 혹(
삶이 죽음을 결정한다. 노년의 공자가 아침 일찍 방문 앞을 서성이며 말한다. “태산이 무너지려고 그런지 대들보가 꺾일려는지 철인(哲人)이 병들려는지(泰山其頹 梁木其壞 哲人其頹)”라며 중얼거리더니 방으로 들어가 문을 마주하고 앉는다. 자공(子貢)이 마당에서 우연히 듣고는 말한다. 태산이 무너지면 나는 어쩌지.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이 병들면 나는 장차 누굴 의지하나. 스승께서 병이 드시려나. 그러고는 스승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니 공자 왈, “자공아(본명 사賜)! 너는 어찌하여 늦게 오느냐”라며 선문답 같은 말씀을 하시더니 몸져 누우시고는 이레 만에 자공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와 같은 큰 사람의 죽음을 일컬어 태산퇴양목절(泰山頹梁木折) 또는 태산퇴양목괴(泰山頹梁木壞)라한다. 사마천은 그의 수필집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그 죽음이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새의 깃털보다도 더 가벼운 죽음이 있다(人固有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성이씨 괄은 죽음에 저항하지 말고, 삶에 저항하라 했다. 왜냐하면 죽음은 선택이 불가하지만 삶은
세금 바치는 국민들을 괴롭히지 마라. 조선시대 여중군자로 불린 이는 단 한 사람뿐이다. 정부인 장 씨 계향으로 퇴계 선생의 후학으로 일가를 이룬 경당 장흥효 선생의 여식이다. 그의 자녀 중 한분이 소설가 이문열 선생의 선조이신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다. 갈암은 광산인(光山人) 이태여(李泰汝)에게 분노에 대해 말하길 유감촉 마한봉섬(有感觸 馬悍鋒銛 한번 일어나면 말처럼 사납고 칼끝처럼 날카롭다.)이라 했다.. 분노란 것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살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남을 화나게 해서 그 당사자가 분노로 덤비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옛 말에 마음의 말은 잃어버리기 쉽고, 감정의 수레는 몰기 어렵다(意馬易失 情車難御).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닌 이상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가 여간 힘들다는 말일게다. 공자시대에 노나라 소공 20년에 백성들이 가혹한 세금과 배고픔 끝에 대규모 시위를 했다. 그때 벼슬아치가 유명한 말을 한다. 정치가 관대해지면 백성은 태만해지고 태만해지면 사나움으로 이를 바로 잡아야하며 사나워지면 백성들이 잔악해 지나니 잔악해지면 관대함으로 이들에게 베풀어야한다. 관대함으로 사나움을 구제하고,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 지금의 50~60대의 부모들은 학창시절을 군대의 연장선상에서 보내야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특전사나 공수부대원들이 입었음직한 얼룩무늬 전투복 흔히 개구리복이라는 탄띠 각반 요대를 모두 갖춘 학생 군복(교련복)을 입고 등교했다. 운동장에 나와 열을 맞춰 쇠를 박아 만든 무거운 플라스틱 총을 들고 총검술을 익혔다. 그러고 나면 팔과 다리 할 거 없이 온몸이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틀리면 뱁새눈 강철 군화 교련선생님한테 군화발로 조인트까지는 것은 당연했고, 더욱 힘든 일은 선착순이라는 고약스러운 벌칙이었다. 다섯 명씩 나눠 분대 조를 짜서 무거운 모형 총을 들고 선착순을 뛰는데 늦게 오는 분대 조는 하루 내내 오리걸음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정신이 몽롱해져서 내가 지금 학교에 공부하러 온 건지 군대 온 건지 헷갈려 지기 시작한다. 한번은 하굣길에 태극기를 보고 그냥 지나쳐 가다가 뱁새눈 교련 선생님과 맞닥뜨린 적이 있다. 우리 일행은 그 자리에 선채로 조인트 까지고 귀싸대기를 맞고서야 집에 가야 했다. 여학교도 끝나서 여학생들도 잔뜩 지나가는 그 길바닥에서 말이다. 지난일은 모두 추억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30년이 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