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김어영 토요일 오후 감기가 찾아와 붙어 지내다 함께 의사를 찾아가 독한 알약을 처방받았다 집에 돌아와 혼자 방에 누웠는데 어느새 뒤쫓아 온 감기가 곁에 눕는다 할 수 없이 밤새 같이 앓았다 늘 곁에 두긴 했으나 20여 년 가까이 깊이 모르고 지내던 감기가 찾아왔다. 모르는 척, 몸 돌보지 않는 내가 괘씸했는지 이번에 나갈 기미가 없다. 열흘째 전신을 앓고 또 앓는다. 아예 몸속에 살림을 차린 모양이다. 아, 아프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좋다는데 당분간 안고 살아가야지. 감기 쫓아낸다고 내 몸을 새벽 문밖에 내놓을 수도 없고, 그래 가는데 까지 가보자. 아직 갈 길 먼 저 혼절의 시간들을 보듬으며.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9 천천히 먹어, 라는 말은 이인원 팔팔 끓어오르는 된장국 속 건지들처럼 모처럼 일찍 귀가한 네가 무지 반갑다는 말, 혼자선 슴슴했던 두부 부침을 넌 천배백배 더 구수하게 느끼기를 바라는 말 생선가시 하나하나 발라주며 낮에 있었던 일을 살짝살짝 염탐해 보려는 말 볼이 미어터지는 네 허겁지겁을 코앞에 붙어 앉아 은근히 즐기고 싶다는 말 네가 밥 한 숟갈 먹는 동안 나는 고팠던 너를 두 숟갈은 떠먹겠다는 말 물바가지에 띄운 버들잎 대신 시시콜콜 내 간섭을 숭늉처럼 후후 불어가며 마시라는 말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밥을 지어본 적 있는 사람은 알 수 있지. 밥과 함께 제 마음도 구수하게 익어간다는 것을. 밥이 뜸 들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에도 뜨거운 마음을 참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가 걸어오고 있을 창밖을 내다보며 손짓하던 사람들이여! 어느 날 갑자기 밥하는 일이 귀찮아지거든 밥통을 들여다보시라. 당신 마음이 밥보다 먼저 식지는 않았는지, 사랑을 속삭이던 뜨거운 입김이 벌어진 마음 틈새로 밥물처럼 빠져나가진 않았는지.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8 당신 김도언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오래 전 죽은 것은 온전히 당신의 불행이다. 매일매일 당신은 무릎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의 저녁을 돌보고 어머니의 길고 긴 목을 닦아주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다가 육지로 돌아온 거친 사내들은 당신의 생밤 같은 얼굴을 만지고 싶어 했다. 당신은 그 중 한 사내의 힘줄을 아무도 몰래 끊고 싶었다.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 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적 없었으나, 심장에 그어진 파문 때문에 당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애인의 허리가 가르쳐준 굴욕을, 손톱을 베어내며 조금씩 떠올렸다. 하얀 종아리를 가진 애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깊어, 마당에 매어둔 자전거들이 말처럼 휭휭 울었다. 당신은 관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종종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별과 비와 시, 눈을 감아도 너무나 잘 보이는 것들만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배꼽을 베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싱거운 모험을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더디 자랐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
나의 고아원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불우(不遇)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제 이 불우라는 말을 남의 것으로만 알고 산다. 살림이나 처지가 딱하고 어려움이란 사전적 의미를 우린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불우, 하면 불우이웃돕기란 말이 먼저 떠오르는 건 나이 30~40대를 넘긴 모든 이들의 공통된 감정이리라. 그런데 이 나라의 산업화가, 자본의 글로벌화가 정말 저 불우로부터 우리를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6 백화점 가는 길 최영미 내 욕망의 절반은 백화점이 해결해 준다. 식품관은 지하에, 화장품은 일 층에, 청바지는 이 층에, 구두는 삼 층에, 침대는 전 세계가 모인 곳, 미국과 유럽의 상점에서도 진열되지 않은 내 욕망의 나머지 절반은 그가 채워 주리라, 믿으며 십 년을 이십 년을 기다렸다. 오지 않는 너. 그를 기다리며, 그에게 발견되고파, 치명적인 향기를 수집한다. 샤넬 디오르 아베다 갖고 싶어서, 갖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사지 못한 불안한 오후. 샴푸는 일 층에, 청바지는 이 층에, 구두는 삼 층에, 그이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쯤 가고 있을까? 우리는 소비를 통해 존재를 증명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를 지배하는 거대 자본들은 우리의 소비를 통해 몸집을 불려나간다. 그들은 소비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거나, 미래의 소비를 위해 밀가루를 공짜로 공급해 주기도 한다. 하여 인간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 생산하기를 포기할 때, 그들은 도둑과 같이 찾아온다. 그때, 우리가 팔아먹을 것은 양심밖에 없다. 우리는 소비의 노예가 되고, 모든 상품과 재앙은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건너올 것이다. 아무것도 사지 못한 불안한 오후를 견딜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밭을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읽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르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읽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 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강원도에는 폭설이 내린다는데, 대설주의보라는 말을 들어본 지도 몇 해 되었다. 물가(物價)를 이야기하며 군부독재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 당신을 보며 어젯밤 나는 슬퍼졌다. 돈 몇 푼을 들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늙고 낡은 가여운 영혼 앞에서, 언젠가 영화에서 본 적 있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으나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4 金堤 서규정 언제여, 마른 꿈을 접어 날렸던 종이비행기는 농약 먹은 풀밭에 지금은 어떤 자세로 뒤집혀져 있는지 모르더라도 맑고 찬 하늘 부셔 오히려 눈물 나고, 흰 두루미 앉았다 뜨던 벌판은 벗어나야 비로소 벌판이겠지 모내기 논에서 동네 사람 몇 웃겨 놓더니, 세탁이나 이발 그 좋은 일자리 다 놔두고 배우가 되겠다고 노을에 물든 마을을 떠난 푼수를 기억하나요 미사일 기지촌으로 가는 트럭, 미군 무릎 위에 인형처럼 떠가던 양공주의 익다 만 미소와 같이 나라가 약하면 우는 일보다 호호실실 웃어야 할 것이 더 많았던 독재와 개발, 젊은 피를 팔러가던 월남전 지글지글 끓던 라디오와 흑백TV에서 듣고 본 서푼 짜리 익살로는 통하지 않던 격랑의 세월을 건너며 대체 무얼 하며 늙었을까 묻지 마세요 꾸욱 다문 입, 생략된 부분이 더 절창일 것이며 우리 삶은 한판 꿈이거나, 연극 같지 않던가요 산다는 건 새끼를 꼬듯 제 갈길 꾸불꾸불 꼬아가듯 백학, 한 모금의 물로 가슴을 적시자마자 긴 목과 다리를 일직선으로 비틀어 짜고, 날아가고 날아가던 金堤, 눈 속에 남은 물기들을 골고루 골라주던 트럭과 먼지의 나날 우리는 트럭과 먼지의 나날로부터,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3 1964 임희구 그해 겨울은 암담했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 뱃속에 있었으므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나 손끝 하나 댈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눈보라가 쳤다 어머니 뱃살로 느껴지는 쌩쌩한 바람들이 날마다 귓전을 울렸다 그 무렵 아버지는 대패질을 하면서 다시는 건너오지 못 할 먼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암세포처럼 독한 약풀에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싹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할 생을 생살로 터득하면서 죽은 듯 입 꼭 다물고 눈 꼭 감고 한없는 날들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머니 그렇게 나를 지우고 지우며 품었다 그 혹독한 겨울이 물러가고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고 저물어 아픈 것들이 아득아득해지면 「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이 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천원이 없어졌고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고, 시대의 암울을 소설로 적고 있을 때 임희구는 엄마 뱃속에 있었나보다. 암에 걸린 아버지, 팍팍한 살림, 어쩌자고 애는 생겨가지고. 그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 역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1 덕담 도종환시인 지난해 첫날 아침에 우리는 희망과 배반에 대해 말했습니다 설레임에 대해서만 말해야 하는데 두려움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산맥을 딛고 오르는 뜨겁고 뭉클한 햇덩이 같은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않고 울음처럼 질펀하게 땅을 적시는 산동네에 내리는 눈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느티나무에 쌓이는 아침 까치소리 들었지만 골목길 둔탁하게 밟고 지나가는 불안한 소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새해 첫날 아침 우리는 잠시 많은 것을 덮어두고 푸근하고 편안한 말씀만을 나누어야 하는데 아직은 걱정스런 말들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도 새해 첫날 아침 절망과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지난 세밑, 가는 해(年)와 절망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술 한 잔 마셨다. 1년 남았다. 그때까지만 잘 견디자 생각하니 절망에 지친 친구의 투정도 그럭저럭 받아줄만 했다. 절망과 희망, 둘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올 한 해, 4월과 12월 두 번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지옥의 편에 선 두 얼굴의 아수라족들은 교묘하게 절망을 위장시켜 희망이라고 둘러댈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꿈속까지 쫓아와 불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1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70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
■ 울림을 주는 시 한 편-69 自己 自身에 쓰는 詩 장영수 참회는 젊은이의 것이 아닌 것. 죽음은 젊은이의 것이 아닌 것. 젊은 시절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미, 있는 세상에 대해 죄악인 여러 날들이 지나가고. 그것은 대개 이 세상 손 안의 하룻밤의 꿈. 하루 낮의 춤. 그러나 살게 하라. 살아가게 하라. 젊은 시절을 너는 美化, 美化만 한다고 말하는 세상에 대해 조금씩 깨어나며 살아가게 하라. 참회는 젊은이의 것이 아닌 것/죽음은 젊은이의 것이 아닌 것. 너나없이 오래 살고 싶어 기를 쓰고, 나라를 팔아서라도 부귀를 누리고 싶어 안달이다. 살아가는 날들이 죄악인 줄 모르고, 살아있는 날이 하룻밤의 꿈인 줄을 모른다. 화무십일홍이라더니, 여기저기 지는 꽃들 비명 소리 들린다. 나이 들수록 영혼을 가볍게 해야 세상 떠날 때 홀가분한 것을, 사람들 욕심을 놓지 못하고 기어이 무덤까지 배를 불릴 생각이다. 인생사 호접몽인 것을, 그래, 나비여 오래 오래 살아라. 이제부터 찬란한 고통의 축제가 시작되지 않겠니?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